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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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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10-12 16:24 조회 4,830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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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말에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어제 다시 실감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목사로써의 각성과 부끄러움이 있었습니다.

 

어릴 적 친구를 어제 저녁시간에 만났습니다.

일찍이 학교보담 사회에 나가 성공과 실패를 반복으로 겪었던 친구인데

얼마 전 부터는 재기한 듯 했습니다.

 

식사 도중에, 최근의 자기 살아온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수년 전 부도가 난 후 파산자가 되고 이혼만큼은 예방하고자 부인과 춘천으로 갔답니다.

월세 보증금도 없이 이사 갈 용달비도 없었답니다.

거기서 힘이 들지만 돈이 된다 말을 듣고는 이삿짐 짐꾼을 했답니다.

이 기술을 배워 지금도 사는데 왜 이런 일을 몰랐는지 지난 세월이 아쉽다했습니다.

나와 동갑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하겠답니다.

밑천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야말로 뼛골 빠지게 일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덕에 지금은 누구에게 손 내밀지 않고 살고 있답니다.

밑바닥의 일이지만 범죄가 아니기에 나름 보람도 있답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이 이렇습니다.

돈 벌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루종일 좌판에서 서서 일하기도 하고 식당물에 손을 담그기도 합니다.

직장에서는 쪼짠한 과장님, 혹은 팀장으로 불리워지기도 하고

때론 사회공의도 주변의 아픔도 외면하면 삽니다.

살기 위해서입니다.

참 치열하고 힘듭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

여기서 아껴서 헌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목사들은 이런 속사정을 모르기 일 수 입니다.

성직이기에 개같이 벌어보질 않으니 그 고통을 잘 모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는 말처럼

삶의 치열함을 모르고는 설교가 공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형교회쯤 되면 사택, 차, 아이들 교육비, 도서비, 목회비, 생활비를 받는데

넉넉하진 않아도 자칫 감사를 잃기 쉽상입니다.

아니 세상 월급장이만큼 못된다고 교인들을 탓하기도 하고

대우 못 받는다고 스스로를 격하시키기도 합니다.

 

중세의 수도자들은 기도외에 육체의 노동을 통해서 진리 정진했답니다.

현대의 목사들도 이런 ‘삶의 체험현장 속으로’가 필요합니다.

 

그 친구를 만난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그의 도량의 깊이와 넓이를 알고 싶어서였습니다.

그럼에도 과연 나 보담 훌륭했습니다.

다른 목적은 그의 하는 일이 참 궁금했습니다.

그동안 아주 꽁꽁 싸맨 그의 직업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매우 부끄러운 듯 결국은 말했지만 그의 떨렸던 입술처럼 사실 부끄러운게 아니었습니다
.

사회에 유덕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떠날 때 쯤 되자 친구는 부인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늦게 퇴근하는 부인과 부천 역에서 만나는가 봅니다.


헤어지며 친구는 내게 봉투를 한 장을 건넸습니다.

“네게 주는 것이 아니야 부인에게 전해 줘, 나도 보니깐 부인이 고생하더라”

그 친구의 하루 일당이 얼마나 될까요?

숙련자인들 얼마나 될까요?

뼛골 빠지게 일해서 정승처럼 쓰고 있는 모양입니다.

 

귀가하면서 그리고 잠자리에 들어서도 우리 교인들의 수고를 나름 짐작해 보았습니다.

작아도 선교비를 보태는 또 다른 성도들의 땀의 무게도 달아 보았습니다.

 

머지않아 예목사가 교회를 개척했던 것처럼 또 일을 벌일 것 같습니다.

목적이 어떻든 그 친구따라 삶의 현장속으로 깊이 들어가 이삿짐도 옮길 것 같습니다.

그 친구도 하는데 난들 못하겠습니까?

이쯤 생각하니 약간의 흥분도 옵니다.

 

그러나 또 이 일을 놓고 기도해야겠지요.

내 몸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 중국선교도 들어가고자 계획이 된 만큼 친구가 건넨 봉투를 보태고자,

아내에게
건네지 않았습니다만 친구의 마음은 전해야겠지요. 

한편으론 그동안 선비되어 책보며 사색하며 기도하며 살았는데 과연 힘 쓰는 일에 용이할까? 하여

두려움도 옵니다.

만약 일한다면 새벽마다 저 부천을 어찌 출근할까도 여간일이 아니기에 생각해야 됩니다.

 

목사는 입으로 설교하는데 능합니다.

친구는 산몸으로 또 삶으로 내게 설교해 주었습니다.

 

피차 격려하며 신호등 앞에서 헤어진 우리는 옛 친구입니다.

그리운 친구였습니다.

각기 다른 삶을 살았던 이 시대의 동반자입니다.

삶의 현장이 다른 친구입니다.

그 친구는 볼 살도 빠진 근육질 몸인데 비해 나는 저팔계였습니다.

정승은 내가 아닌 친구였습니다.


삼하 23:15~17) 다윗이 사모하여 가로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나로 마시게 할꼬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군대를 충동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 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 드리며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생명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갔던 사람들의 피니이다 하고

마시기를 즐겨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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