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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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목사님, 김 아무개목사입니다. 어제 들어왔습니다."
오전에 문자가 왔습니다.
중국 연변에서 오신, 금번에 목사로 장립된 조선족목사입니다.
여지껏, "김 아무개전도사입니다" 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자칭의 호칭이 달라졌기에
귀엽다고 느꼈습니다.
반가움으로, 목사가 된 턱으로 밥사라 했습니다.
김 목사는 두만강상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그곳에서 목회하다 변고를 치렀고,
이 탓에 지금은 좀 구석진 곳에서 아주 작은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두만강에 이면수가 있슴다" 하며 물고기 말린 것을 갖고 왔던 그 강변사나이가
'"지난 겨울에 동네사람들과 산돼지를 잡았슴다" 하는 산골사나이로 되었지만,
여전히 자전거로 북한을 왕래하며 양식과 의류를 나누며 찾아온 탈북자들도 위합니다.
"아무리 철조망을 쳤어도 개구멍이 있잖슴까? 우리는 거길 알잖슴까? 그리로 옴다"
"결혼하기 전에는 탈북자들이 오면 한밤중에라도 나가고, 있는 것 다 주고 왔는데
이제는 얘가 있어나서말임다, 솔직히 다 주질 못함다."
이런 그가 고난의 행군때는, 한 뼘 강 건너 북한에서 탈북한 배고픈 인민들을 도와주다
북한과 중국에서 수배를 당했고 옥살이도 했으며, 지금껏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습니다.,
굶주린 인민들을 7000명을 넘게 구제했으니, 양국에서 표창을 해야할 일인데도
이념과 체제가 무엇인지 핍박을 받고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겁니다.
오래 전의 그의 실정이 아직도 귀전에 울립니다.
"오~ 얼마나 옴까? 똑똑똑 문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면 그들이었슴다.
어느 날은 눕지도 못하고 밤새 그들을 맞이했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요? 조선족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돈벌러 한국행을 하는 때인데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는 소수 중의 청일점이기도 합니다.
"제 어머니가 어렸을제 두만강 건너편에서 사셨는데 고아가 된 후 강건너 이리로 시집왔슴다
어머니가 굶주려 봤기에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지 못했슴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과 그 첩첩산골에서 주를 만난 은혜의 빚으로, 저들에게 주의 사신된
소명과 은사를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한국에 온다한들 그를 반기는 교회나 기관은 없습니다.
아직 늦도록 장가 못간 동생이 있고 처남이 있을 뿐, 그러기에 비행기값을 아끼려 선박과
기차로 긴시간을 돌아서 오고가며, 머무는 동안은 열심히 세미나에 참석하여 신지식을
보충하고 중국에서 건져준 탈북자들이 정착한 모양을 보며 저들과 옛일을 회상하곤 합니다.
한국행 비자 내기가 지금보다 어렵던 시절에 초청장을 내준 것을 고마워하는지 오면 신고하고
내가 가면 인사하러 오곤하기를, 그동안 그렇게 벗이요, 아우로써 기도하며 한 곳을 위해
동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끔은 쇠약해지는 의식상태에 있다가도 열악한 환경에서의 목회하는 저와 저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납니다.
목회에 있어 한국은 중국에 비하면 확연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가 한국에 오면 여러모로 실망을 합니다.
"한국은, 중국을 향해 탈북자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받지 않느냐고 항의하면서 왜 불법체류자들은
그처럼 안 봄까? 더욱이 동포라면서, 다 같은 살 길 찾아 온 것인데, 추방을 함까?"
이런 그가 드디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가 이번에도 잠시 또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빌립보를 강해해 주실 때에 좋았슴다. 그후론 엘리야와 엘리사도 하지않았슴까?"
이런 그가 어느덧 50을 넘긴 중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때는 억센 함경도사투리로, 어느때는 연변 사투리로, 어느때는 이 둘이 합쳐져 그의 말은
아직도 신경쓰고 들어야 하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여기와서도 잘도 다닙니다.
"여긴 좋단말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다 간다말입니다."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오전에 문자가 왔습니다.
중국 연변에서 오신, 금번에 목사로 장립된 조선족목사입니다.
여지껏, "김 아무개전도사입니다" 했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자칭의 호칭이 달라졌기에
귀엽다고 느꼈습니다.
반가움으로, 목사가 된 턱으로 밥사라 했습니다.
김 목사는 두만강상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고 그곳에서 목회하다 변고를 치렀고,
이 탓에 지금은 좀 구석진 곳에서 아주 작은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두만강에 이면수가 있슴다" 하며 물고기 말린 것을 갖고 왔던 그 강변사나이가
'"지난 겨울에 동네사람들과 산돼지를 잡았슴다" 하는 산골사나이로 되었지만,
여전히 자전거로 북한을 왕래하며 양식과 의류를 나누며 찾아온 탈북자들도 위합니다.
"아무리 철조망을 쳤어도 개구멍이 있잖슴까? 우리는 거길 알잖슴까? 그리로 옴다"
"결혼하기 전에는 탈북자들이 오면 한밤중에라도 나가고, 있는 것 다 주고 왔는데
이제는 얘가 있어나서말임다, 솔직히 다 주질 못함다."
이런 그가 고난의 행군때는, 한 뼘 강 건너 북한에서 탈북한 배고픈 인민들을 도와주다
북한과 중국에서 수배를 당했고 옥살이도 했으며, 지금껏 요주의 인물로 찍혀있습니다.,
굶주린 인민들을 7000명을 넘게 구제했으니, 양국에서 표창을 해야할 일인데도
이념과 체제가 무엇인지 핍박을 받고 감시를 당하고 있는 겁니다.
오래 전의 그의 실정이 아직도 귀전에 울립니다.
"오~ 얼마나 옴까? 똑똑똑 문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면 그들이었슴다.
어느 날은 눕지도 못하고 밤새 그들을 맞이했슴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요? 조선족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돈벌러 한국행을 하는 때인데도
그는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는 소수 중의 청일점이기도 합니다.
"제 어머니가 어렸을제 두만강 건너편에서 사셨는데 고아가 된 후 강건너 이리로 시집왔슴다
어머니가 굶주려 봤기에 굶주린 이들을 외면하지 못했슴다"
이런 어머니의 영향과 그 첩첩산골에서 주를 만난 은혜의 빚으로, 저들에게 주의 사신된
소명과 은사를 발휘하고 있는 겁니다.
사실 한국에 온다한들 그를 반기는 교회나 기관은 없습니다.
아직 늦도록 장가 못간 동생이 있고 처남이 있을 뿐, 그러기에 비행기값을 아끼려 선박과
기차로 긴시간을 돌아서 오고가며, 머무는 동안은 열심히 세미나에 참석하여 신지식을
보충하고 중국에서 건져준 탈북자들이 정착한 모양을 보며 저들과 옛일을 회상하곤 합니다.
한국행 비자 내기가 지금보다 어렵던 시절에 초청장을 내준 것을 고마워하는지 오면 신고하고
내가 가면 인사하러 오곤하기를, 그동안 그렇게 벗이요, 아우로써 기도하며 한 곳을 위해
동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끔은 쇠약해지는 의식상태에 있다가도 열악한 환경에서의 목회하는 저와 저들을 생각하면
정신이 납니다.
목회에 있어 한국은 중국에 비하면 확연한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가 한국에 오면 여러모로 실망을 합니다.
"한국은, 중국을 향해 탈북자들을 인도적 차원에서 받지 않느냐고 항의하면서 왜 불법체류자들은
그처럼 안 봄까? 더욱이 동포라면서, 다 같은 살 길 찾아 온 것인데, 추방을 함까?"
이런 그가 드디어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그가 이번에도 잠시 또 나왔습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빌립보를 강해해 주실 때에 좋았슴다. 그후론 엘리야와 엘리사도 하지않았슴까?"
이런 그가 어느덧 50을 넘긴 중년이 되었습니다.
어느때는 억센 함경도사투리로, 어느때는 연변 사투리로, 어느때는 이 둘이 합쳐져 그의 말은
아직도 신경쓰고 들어야 하지만, 그는 개의치않고 여기와서도 잘도 다닙니다.
"여긴 좋단말입니다. 지하철을 타면 다 간다말입니다."
막12: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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