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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05-12-22 21:00 조회 1,57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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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12.18(주일설교)
설교자 예용범 목사
성경본문)마2:1~12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래도
교회 생활을 비하하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예배당에 갔더니 눈 감으라 하더니 신발 훔쳐가더라
날 잡아 잡수 날 잡아 잡수...>


아마 신발을 비롯한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대였기에 교회당에
와서 신발 훔쳐가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1)교회당에 오는 목적
동서고금을 통하여 보면
예배당을 오는 사람들을 여러모양으로 분류할수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오는 부류가 있습니다.
부부중
어느 하나만 믿거나
부모자식중
부모만 믿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어느 한 부부나
자식에게 있어서
상대방의 요구에 따라 예배당을 한번만 다녀와주면
한주간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본인에게는 부담이고 고역이고 고통일수 있지만
죽은자의 소원이 아닌 산자의 소원이고 보니
선심형으로 교회당에 옵니다.


믿는 부부나
믿는 부모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옵니다.
손님이요 구경꾼이요 나그네의 행차 인것입니다.


-개인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정치인은,표를 얻기 위해서
상인은, 사업을 낫게 하기 위해서
혹은, 배필이나 약간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일은 옛날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예배하러 오는 순례자를 위해서
예물을 팔거나
돈 바꾸는 환전상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에게 예배당은 유세장이요,시장인것 입니다.


이들을 향한 주님의 반응을 기억하십니까?
요2: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교회가 종종 선교니 구제니 하는 미명으로 바자회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씀에 비추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봉사의 목적으로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을 봉사로
예배의 의미를 헌신으로 찾는 경우입니다.


그들의 열정은 좋지만
여하한 본질에서 빗겨간 모습입니다.
예배가 우선입니다.


교회의 봉사자들이 예배를 빠지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은 신령한 덕을
반감하며 그 영혼은 병들거나 죽기 쉽상입니다.


먼저, 일보다는 예배, 헌신 보다는 드림이 앞서야 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러한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날씨따라 혹은 기분따라
교회당에 오기도 하고 예배에 빠지기도 합니다.
이들은 자기 이름과 명분에는 강하고 찬양은 약하며
감사에는 인색한 특성을 갖습니다.


이 모양을 가능할수 있는 모습은 쉽게 파악되고 있습니다.
주일 낮 예배가 100명 모였다면
저녁은 50명 되고
수요일은 30명 되며
금요일은 20명 됩니다
그리고 새벽기도회는 5명 남짓되는 현상이 어떤 모습으로 교회당을 찾는가?
를 방증합니다.


-교회당은 <예배자>로 나와야 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예배할수 있습니다만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정하신
식양따라 예배하는것이 중요합니다.


즉, 주의 날에
주의 세우신 몸된 교회에서
구원받은 성도들끼리 모여 구원의 감격과 감사를 갖고 찬송과 경배하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성도들은
워쉽과 펠로우쉽의 차이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워쉽의 대상은 하나님이시고 웰로우쉽은 성도들 입니다.


흔히 결혼 예배하는데 잘못입니다.
결혼 예식해야 합니다.


아무게 목사 장립예배하는데
아무게 목사 장립식해야 해야 합니다.


언뜻 모양은 비슷하나
본질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2)동방박사
우린 예배를 동방박사들에게서
배울수 있습니다.


이들은,예배하려는 신령한 목적 한가지로써
동방이란 먼 지역에서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유대땅까지 왔습니다.


마2: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이와 같은 모습은
사도행전의 에디오피아 내시에게서도 볼수 있습니다.


출장차 관광차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배한것이 아니라
오직 예배라는 목적으로
먼곳을 찾아 왔던것입니다.
행8:27)~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목적이 무엇이냐?는 항상 중요합니다.


목적만이 으뜸되고 나머지는 생략될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가정의 화목이 목적이라면
예배는 생략되거나 취소될수 있습니다.
가정의 화목은 쇼핑을 위한 외출이나
외식에서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정치적 목적이나
상업적 목적이나
아님 봉사나 헌신으로 목적삼았다면
역시 예배는 무시될수 있습니다.
목적이 충족되면 되는대로
않되면 안되서 떠날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당을 오는 이는
항시 예배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동박박사의 고백을 새기 십시오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이 목적을 달성시키고자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으로 옮기는 일에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예배시간이 조금 긴것에 대해서
불평하는 성도들과 얼나나 다릅니까?


3)준비된 예배
예배가 목적인 사람들은
예배를 준비합니다
예배하는 한날을 위해 한주간을 살고
예배 한두시간을 위해 그날을 삽니다.
행8:27~28) ~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예배자는 이렇습니다.
돌아가는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찬송가 82장) 나의 기쁨 나의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이들에게는
내 멋이 아닌 예배를 위한
복장과 예물도 준비합니다. 무엇보다도
예배자의 마음이 기도로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결석이나 지각이 있을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동방박사들은
동방고향을 떠날때 부터 예물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할머니, 어머니 시대가 그랬습니다.
모두가 가난했지만
예배에 있어서는 풍요로왔습니다.



며칠전 부터
저고리 동정을 달고
고무신을 빨아널고
1주일동안 성미를 모으고
헌돈을 새돈으로 바꾸는 등,
준비했습니다.


이때 국가가 산업적으로 흥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의 이혼은 없었습니다
이웃은 피차 신뢰할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경제가 나아지고
지식과 정보를 다 갖고 온갖 편리한 문화생활을 구사
하지만 국가는 소란하고
국민은 희망을 잃고 있습니다.


예배는 죽고 예배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두되는 것이 <예배갱신>입니다만
실상은 예배의 부흥이어야 하고
예배자의 갱신이어야 합니다.


예배의 순서가 문제가 아닌
예배자의 인격과 삶에 예수님이
계셔야 됩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라


결론)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예배나 예물이 아닙니다
찾으시는 것은 예배자 입니다.


동방박사를 찾아주셔서
위기를 모면한체 고국에 가도록 하셨습니다.
마2:2) 꿈에 헤론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에디오피아의 내시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옛 솔로몬 왕도 100번의 제사를 드린후 하나님이 찾아 주셨습니다.
그때 지혜와 보화도 주신것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찾는것과
하나님이 인생을 찾아주시는것!
무엇이 낫습니까?
무엇이 합리적 입니까?


기독교는 주님이 찾아와 주심으로 출발합니다.
성탄은 주님이 찾아와 주신 사건의 날입니다.


앞으로 누군가가 교회당은 왜 가느냐? 묻거든
<경배하러 가노라!>하십시오


여기에 미래의 희망이 있고
여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경배하는 일!
주님을 아는 이들만의 찬송행위요
더 나은 신앙고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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