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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은 어디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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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5-26 19:24 조회 1,412회 댓글 0건

본문

동물의 세계는 양육강식의 세계입니다.

약한 자가 잡아먹히는 법칙따라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회성 있는 동물도 있습니다.

죽게 된 돌고래를 다른 무리들이 주둥이로

물 위로 떠올리는 행동을 보였습니다.

살리고자 안간 힘을 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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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들은 새끼가 죽자

그 새끼 시체를 코와 발로 어루만진 후

비로써 곁을 떠났습니다.

사막의 낙타는 새끼무덤을 잊지 않는 답니다.

나그네는 길 떠나가면서 새끼를 죽여 무덤을 만든 후

낙타로 하여금 그 곳을 찾게 하여 길 잃는 일이

없도록 한답니다.

 

1)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은 동물이나 식물이나 사람에게 무한한

관심을 나타내셨습니다.

 

태초의 범죄하여 타락한 아담을 향하여

“네가 어디 있느냐?”하셨고

그 후에 동생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인 카인을 향해서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셨습니다.

이는 그의 죄를 지적하시면서

이웃으로써의 역할을 촉구하심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글을 쓰고 말을 하고 음악을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과 관계를 맺은 것처럼

관계를 맺고 사회적 역할을 이룰 수 있는 존재인 까닭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

사람의 격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도 강도만난 사람을 비유하시면서

“네 이웃이 누구냐”하셨고

그를 도와 준 사마리아인처럼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셨습니다.

 

2) 타락의 황폐함

아담의 범죄와 타락은 즉시 이러한 모든 관계를

죽게, 곧 단절시켰습니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창2:17)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죽으리라”는 이 관계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결국 육체의 죽음도 이르게 된 것입니다.

 

카인은 아담의 아들입니다. 먼 후손이 아닙니다.

그가 동생을 죽게 한 시기, 질투도

단절로 말미암아 온 죄의 권세입니다.

이토록 즉시, 정녕 죽음이 왔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나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기에 그 마음이 어둡고

부패하여, 사람도 이웃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온갖 독재자나 살인자들의 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잔인한 사람들은 자연과도 친화적이지 못합니다.

잠12:10)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

 

세상이 망가진 순서입니다.

구원이란 이 관계의 회복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종교적이지만 않습니다.

관계적이고 문화적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신앙일수록 경건을 자기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여

신앙목표가 자기 탐심추구에 맞춰집니다.

 

딤전6: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만약 우리의 기도가 자신을 위한 일에 있다면

우리의 신앙목표가 물질형통에만 있다면 어떨까요?

 

기독신앙의 차별이 무엇인가요?

기독신앙의 탁월함은 무엇인가요?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인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고

예수님의 사랑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을, 믿음으로 건축한 신앙이 이기적일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볼 것은

일반적인 사람들도 타인에 대한 배려, 긍휼 등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미혼모, 북한의 결핵약과 분유보내기 등에

동참합니다.

타종교인들도 그렇습니다.

여기에도 이타적인 것이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 기독신앙과 같을까요?

아니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의 이타적 사랑에는

계수하지 않아야 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됩니다.

 

종종 모금방송이 나옵니다.

라디오보다 tv이가 월등한 모금효과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같은 사랑나누기 일지라도 tv가 자신을

나타내는데 효과적이기에 tv로 몰리기 때문입니다.

이게 세상의 사랑입니다.

이것은 기독신앙의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너희가 구제 할 때에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이것이 참 구제답다” 하셨는데

참 이웃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기독사랑은 훌륭합니다.

 

전 세계 2300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고

복음방송이 라디오, tv합쳐서 5개가 넘습니다.

구호, 구제단체는 얼마나 많습니까?

5000년을 넘긴 불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이 사랑실천은 오늘의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에 기초한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성숙을 나타내는 온도계입니다.

사랑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변화됩니다.

 

지난 5월 초하루에 어느 권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작아서 부끄럽지만 자기의 있는 것을 정리해서 바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75세의 권사님은 경기도 오이도에서

45세의 아들과 사는 분이었습니다.

북한 관련 사역을 위해 자신의 금붙이를 팔았습니다.

 

이 권사님이 훌륭한 것은

고향이 이북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을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이 먹을수록 삶과 자기 애장품에

집착이 강한데 권사님은 오히려 떨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산받은 산도 팔리면

내 놓겠다“고 했습니다.

 

산 신앙입니다.

 

결론) 본문의 카인과 아벨을 보십시오.

카인은 인격도 삶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앙만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인격도 거부하시고 제사도 거부하셨습니다.

 

반면 아벨은 카인과 다르게

그 인격과 삶도 제사와 함께 받으셨습니다.

 

이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외모로 판단치 않으십니다.

 

오로지 ‘중심’입니다.

 

이웃에 대한 관심은 형편과 무관해야 합니다.

형편에 맞추면 평생에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겉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은 구호가 아닙니다. 실천이고 실행입니다.

 

흔히 복 받고 장수하며 형통하길 원하지만

붙들고 있는 방식은 하나님과 반대적입니다.

하나님도 이웃도 없는 카인은

창4: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이를 답습하고 있지 않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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