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의 변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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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도 한 사람의 평가는 그 사람이 죽은 후에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평가, 분명히 사람들의 평가와는 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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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롯 유다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요?
그럼에도 사람들과 같이 확실한 배신자일 것입니다.
오늘 가롯 유다의 다른 모습을 상고하고자 합니다.
1) 역사
인류 역사의 기록은 강자나 승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러다보니 평가나 기록에 있어 다소 억울한 패자나 약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국의 조조가 그럴 것입니다.
유비는 덕장으로 평가된 반면 조조는
간특한 악인으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그가 남긴 글들을 보면 애국자요, 사상가요, 혁명가요, 지략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황제가 된다는 것, 어찌 자신의 실력과 능력 혹은
운만 좋아서 되었겠습니까?
백성이나 부하의 지지도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만큼
그는 역사의 평가처럼 악인은 아닙니다.
이순신 장군을 모함했던 원 균은 어떨까요?
놀부는 어떨까요?
오히려 대책없는 흥부에 비해서 계획있고 사업성있는,
그리고 흥부에 대해서도 분명한 선을 긋는 경제인 아닐까요?
그렇다면 가롯 유다는 어떨까요?
사실은 영원한 배신자입니다만
진실은 무엇일 수 있나요?
2) 가롯 유다
본문은 가롯 유다의 자책과 자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자책의 모습입니다.
5절)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려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자살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스스로’가 반복됩니다.
누가 책망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책임을 느끼고
누가 벌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죽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남은 제자 중에 이렇게 행동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3번씩이나 부정했던 베드로조차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실 때까지
단 한번의, 또 한마디의 “죄송합니다” 하지 않았습니다.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변형됨을 본 후
놀랐던 요한, 야고보, 베드로는 물론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다 도망했습니다.
그들에게 어떤 반성이나 변명이 없었습니다.
어떤 사건의 가담여부에 따라 자타의 평가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배반한 사건에 대해서, 일반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가롯 유다 - 매우적극가담(죄질이 아주 나쁨)
베드로 - 적극가담(죄질이 나쁨)
요한, 야고보 -가담 (죄질이 나쁨)
나머지 제자 - 단순가담(정상참작)
여기서 객관적으로,
과연 누가 진짜 죄질이 나쁘냐 입니다.
예수님을 팔았던 가롯 유다는 자신도,
죽어 마땅한 만큼 스스로 목매어 책임을 졌다면
다른 가담자들은, 책임은 물론 처벌이 없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변명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스승을 배반한 죄는 죽을 죄였다면
스스로 책임을 느껴, 스스로 그 책임을 몸으로 감당한
행위만큼은 훌륭하고 평가되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럼에도 진실은 외면되고 사실만 부각된 것이
못내 섭섭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섭리나 신학적인 부분을 초월해서
행동하는 양심, 책임지는 신앙은 우리가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의 비석이 있다면 배신자라는 글귀 옆에 어쩌면
‘그럼에도 행동하므로 책임을 졌노라’해야 할 겁니다.
3) 세상의 문제
왜 세상이 시끄럽습니까?
많은 사고와 사건이 있는데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변명., 책임전가 때문이지 않습니까?
‘비겁한 양심’ ‘비굴한 신앙’입니다.
고리원전사고의 책임은 누가 졌습니까?
2000여명의 민간 사찰에 대한 책임은 누구입니까?
언제나 몸통은 무사하고 깃털이 책임을 지니
진정한 책임이 되질 않습니다.
책임에는 1차적, 2차적, 3차적, 또한 연대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청년백수의 책임은 1차적으로 누구입니까?
청년입니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책임은 누구입니까?
정치는 정치인이,그 정치인에 대해선 모두의 연대책임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런 정치인을 선출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무조건 3차, 무조건 정치인, 정부를 탓하는 것은,
책임회피입니다.
이제는 책임을 감당해야 합니다.
4) 그리스도인의 책임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책임을 질줄 아는 사회인입니다.
주님이 음행하다 잡혀온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노니 가라, 가서 다시는 죄짓지 말라”
“가라”는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죄짓지 말라”는 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은혜가 앞서고 계명이 뒤따라 옵니다
이와 같이 성도는 앞서 은혜를 입은 거룩한 백성인 만큼
세상에서의 책임이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러므로 시대의 책임을 “네 탓”이라고 비루기보다는
“내 탓이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암울한 시대상을 보고 탄식하며 울기까지 했습니다.
무한책임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요나 선지자도 그랬습니다.
바다의 풍랑이 높자, 바다 탓이나 선장 탓으로 돌리지 않고
“나를 바다에 던지시오’”했습니다.
이 책임에 바다는 잔잔하고 바다사람들은 살았습니다.
현 시대에 있어 실종된 것이 많습니다.
굴뚝이 실종되니 저녁연기가 그립습니다.
이웃이 실종되니 정겨움이 그립습니다.
특별히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시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이 실종된 후
앉은뱅이를 향해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했던 영성도 잃었습니다.
톨스토이는,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은 좋은 감정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워하는 것은 더욱 더
좋은 감정이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더 나아가 역사는 물론
하나님의 판단을 부끄러워하고 어려워해야 합니다.
여기서 ‘성도의 윤리’가 형성됩니다.
결론) 조심할 것은 그리고 명심할 것은
그럼에도 가롯 유다의 책임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 이유는 그가 처음부터 ‘마귀의 자식’인 까닭입니다.
하나님은 카인을 거부하시니 카인의 제사도 거부하셨습니다.
반면 아벨을 열납하시니 아벨의 제사도 열납하셨습니다.
이 이유를 아십니까?
사람, 즉 인격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가롯 유다는 스스로 책임지는 방식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식을 취했습니다.
이 또한 마귀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그의 책임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스스로 뉘우치고
스스로 책임을 졌어도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한 체
결국 저주라는 마침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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