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신앙인
페이지 정보
본문
고물상을 하는 어느 집사님은 등산길에서 대통령후보와 사진을 찍었습니다.
얼마 후 그 후보가 대통령이 되자 사진을 확대해 자기 방에 걸어 놓았습니다.
이상한 것은, 그 후 귀찮게 하던 여러 사람들의 발걸음이 그쳐졌습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진리입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강도만난자의 친구는 고사하고 그의 이웃은 누구도 자원하질 않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웃이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성도는 거듭남의 사람인만큼 가치관이 달라져
1. 물질보다는 하나님과 사람이 귀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흔히 ‘경천애인’는 옛글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경전체에 흐르는 복음적 사상이고
성도의 가치입니다.
고인 되신 어느 목사님은, 기독교는 사람을 예수화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되게 하는 것이라 했습니다.
곧 경천애인입니다.
이 단순함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되어 돈벌레, 밥벌레가 되고 개보다 못한
사람이 되었기에 하늘, 땅의 탄식은 물론 사람이 제일 힘든 시대를 맞이했으며
미래에는 더 고통받는 시대로 도래한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입니다.
딤후3: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복음은, 거듭나게 하는 주의 능력입니다.
참 사람되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참 예수화되는 일입니다
예수님만이 온전한 ,경천애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2.경천애인의 가치관은 만남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람의 시작은 만남의 시작이고, 죽음은 끝입니다.
여기에 우연은 없습니다. 섭리와 선택으로 비롯됩니다.
부모 형제의 만남은 섭리입니다.
배우자, 벗, 동역자 등의 만남은 섭리입니다.
무슨 만남이냐 따라 면으로 구성됩니다.
이런 만남, 얼마나 소중합니까?
어느 남배우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영화제작 실패로 곤경에 처했습니다.
낯선 땅, 부산에서 헤메고 있을 때 한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분의 적극적 도움으로 사업재기를 이루었고 인생재기가 되었습니다.
남배우는 이분을 ‘귀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만남을 소중히 여긴 복입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부지중에 대접했지만, 성의껏 대접했습니다.
누구였습니까? 천사요, 주님이었습니다.
모세는, 미디안 광야 우물에서 양치는 소녀를 도와주었습니다.
십보라입니다. 부인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어땠나요? 감옥에서 왕의 시종을 만났습니다.
그에게 신뢰받아 왕 앞에 설 수 있었습니다.
세상가치의 만남은 인스탄트식입니다.
좋으면 만나고, 싫으면 헤여짐입니다. 즉 이용가치가 관건입니다.
그 배경에는 우연 혹은 의도 등 있어 단물 뽑을 생각만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섭리와 선택 이라는 안목으로 만남을 이해하기에
신중합니다.
훌륭한 성도일수록 단물 줄 생각을 하기에, 진정한 이웃이 되고 친구가 됩니다.
시41:1)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라
마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953년생, 남자 중국동포가 이 땅에 와서 사장이 같은 주유소와 식당에서
온갖 일을 7년 동안 했습니다.
사장은, 종종 구타도 했습니다. 잠자리는 망가진 비닐하우스였고
하루도 쉼이 없었습니다. 외출은 물론 중국가족에게 전화도 못하게 했습니다.
임금은 한 번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방송사에 제보해 줘, 구출해 냈습니다.
비로써 그의 미소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두 마디가 슬프게 들렸습니다.
“돈이 뭔지...”(그는 돈 벌러 왔다가 험한 꼴 당한 겁니다.)
“얘들이 보고 싶어요” (기자가 중국으로 전화했지만 번호가 바뀌었습니다.)
상황으로 보건대, 가족들은 아버지가 실종된 겁니다.
아주 나쁜 사장입니다.
주님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내게 긍휼히 있음은,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앞서 하나님의 시각에서 자신을 보았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도입니다.
이런 사람은 타인에게 아니 빈약한 자라도 군박할 수 없습니다.
무례하지 않습니다.
만남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자기행위에 대한 책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사마리아인이 그랬던 겁니다.
3.거듭남의 사람은 충성합니다.
주님의 또 다른 이름이 충성인 것 아시지요.
33년의 삶이 충성이었습니다.
제자양육에도 그랬고, 구속사역에도 그랬습니다.
요17:12)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존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 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하려함이라
하나님 아버지가 이끌어 맡기신 제자들, 잃지 않으셨습니다.
충성하신 까닭입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명령 중에는 충성도 있습니다.
고전4:2)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
부모로써 충성이 있어야 합니다.
자식을 놔둔 체의 이혼은 불충입니다.
한 교인으로써의 충성이 교회를 튼튼하게 합니다
국민으로써의 충성은 뭇 국민에게 귀감이 됩니다.
성도들이 납세나 병역에 문제를 일으키면 복음이 빛을 잃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만나자의 이웃으로 충성했기에
치료경비까지 담당하며 다시 들리겠다는 언약도 했습니다.
결론) 제사장도 레위인도 강도 만난 자를 피했습니다.
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며 자타가 인정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무시했습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함은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함이라”
이들은, 밥벌이 신앙인이요, 겉치레 신앙인 일 겁니다.
현대의 강도 만난 자는 종류도 그 숫자도 많습니다.
이혼자와 사별자가 200백만이 넘습니다.
신용불량자가 70만이 됩니다.
노숙자는 얼마입니까? 미혼모, 장애인, 고아 등
웅장한 건물의 예배를 지향하면서 그 그늘에 가려진 강도만난 자를
외면한다면 어떨까요?
그 건물이자와 관리에 큰 비용 쓰면서 이들을 살피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무엇인가요?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자비없는 신앙인,
희생없는 종교, 껍데기입니다.
주의 말씀에 고민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