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제일교회
홈로그인
HOME · 설교&칼럼

십자가를 지고 > 설교말씀

십자가를 지고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09-03-02 15:31 조회 1,553회 댓글 0건

본문

일 자: 2009.2.15

본 문: 요19:16~18

설 교 자: 예용범 목사


고대의 십자가 형은

가장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머리위에는 까마귀와 독수리가 날고,

피와 물을 다 쏟기까지 고통중에

죽도록 했던 최고의 극형이기 때문입니다.


1)십자가

십자가는 그 형을 집행하는 끔찍한

형틀입니다.

그러므로“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고난과 죽음의 상징되어

자기희생과 자기 비움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만


현대에 이르러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상실한 체 한갖 장신구로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자의 경우 좀 더 신앙인답게 보이고져

젊은이들 경우 좀 더 아름답거나 우아하게

보이도록 보석화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십자가 의식‘이

각종 갈등과 성공주의와 승리주의를

잉태하고 있다면 믿겠습니까?


본문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해골이라는 곳에 나오시니...“ 했습니다


의미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은“자기의 고난을, 희생을, 비움을’ 지고

죽음까지 갔다“로 할 수 있습니다


이덕에 만인이 살게 되고

나와 여러분이 하나님과 화목하여

평안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롬3:25~26)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 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


그렇다면 우리 예수 믿는 이들은

어때야 됩니까?

단연코 따라야 할 그것도 내 몫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십자가 인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어떻습니까?

2)십자가를 "앞세우고" 따라가고자 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와 앞세우고.. 의 차이는

작은 것 같으나 사뭇 큽니다.


앞세울 때는 포기, 희생, 비움보다

승리, 성공 , 집착 ,지배 등의 성격이 강합니다.

혹 뉴스에서 보셨는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모 단체가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십자가에 바퀴를 달고 끌고 가는 행진을

보았을 것입니다.

앞세운 모습입니다.


대표적 예로 십자군 전쟁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앞세웠을 것입니다.

깃발로 펄럭이게 하고

방패에 새겨 넣었을 것입니다.


명분은 선교라지만 실제는 침략군이

되고 점령군이 되어 죽이고 약탈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이런 일은 허다하게 발생하고 있습니다.

선교지에서 그들의 문화를 짓밟고

그들의 신앙을 공격합니다.


주변을 보면 교단이나 교회들도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김보다 군림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십자가를 앞세우는 곳은

언제 어디서나 섬김, 비움, 사랑이 없습니다.

있는 것은 교만, 갈등, 다툼만 가득 찹니다


교회가 왜 분열합니까?

교단이 왜 몸살합니까?

십자가를 "지기"보다는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앞세운 곳에는

나 살겠다, 우리 살겠다,하는 확신이

작용한 곳입니다.


정치의 경우 ‘개발 독재’가 무서운

이치입니다.

명십하십시오

십자가를 앞세우면 팔이 안으로 굽는

현상이 옵니다.


3)십자가를 지고

참 신앙은 희생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더욱이 기독신앙은 더 큰 신앙과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화평을 원합니까?

사랑을 원합니까?

그렇다면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모습은 팔이 밖으로 뻗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면 믿음 있는 자가 없는 자에게

맞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맞추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사11:7)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즉 사자가 소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자가 소처럼’풀을 먹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힘은 신조가 아니라 지기를 비운

십자가를 지는 ‘사랑’만이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는 갈릴리의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동정녀 탄생의 예수,

부활의 예수, 영광과 재림의 주님도 믿지만

실제적으론 갈릴리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십자가를 지신 것은 단회적 사건이었지만

갈릴리의 삶은, 십자가를 지신 삶이었음을

알아야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의 삶에서

굳게 믿기만 했던 유대교의

화석같은 신념적 믿음을 깨트리셨습니다.


*예배가 무엇인 줄 아느냐?

예루살렘 혹은 그리심 산에서 드리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라

신령한 삶과 진정한 인격에 있다.


*소외되었던 인권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가나 잔치집은 여인과 종들이 주도한

사건 아닙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한 어린아이의 헌신으로

비롯 되었잖습니까?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향하여

‘네 자리를 들고 가라’하시면서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시지 않았습니까?

삭개오집을 심방하신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건은

앞서 낮아짐의 마음, 자기희생에서

시작됩니다


그 결국 마침내 밟히는 길이 되셨고

씹히는 떡이 되신 것입니다.

이쯤 되면 기득권자들의 반감을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그 뿐만이 아닙니다

십자가 처형 앞에도 항변이나

타협하지 않고 부활하심으로

사랑의 완성을 꽃 피운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의 초기 제자들은 십자가의 덕을

볼려고 따랐던 사람들 이었습니다.

십자가에 죽는 예수님을 본 후

실망을 안고 낙향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후 십자가 짊의

참 승리! 참 성공! 참 완성을 알고,

베드로의 경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거꾸로 못 박혀 죽기를

자청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앞세워

십자가의 영광,형통,부유함을

무임승차식으로 영유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힘들어도 짊으로써 이루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를 지는 신앙은

오늘날의 현실적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도 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