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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때에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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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09-09-13 10:48 조회 1,502회 댓글 0건

본문

일 자:2009.8.30

설교자: 예용범 목사

본 문:히11:21


성경 주석가 매튜 헨리는 “믿음의 은혜가 우리 삶 전체에 보편적으로 활용되지만

우리가 죽게 될 때에 특별히 더욱 그러하다. 믿음은 그 마지막 때에 크게 행한다.

신자들의 삶을 잘 마치게 도와주며 죽으면서도 주님을 위하게 하고 인내와

소망과 기쁨으로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럼으로써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천국과 영생에 대한 확신과 확증을 준다.“고 했습니다.


1) 믿음의 야곱

무슨 말인가요? ‘믿음의 진가는 평소보다 죽을 때에 더욱 발휘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죽기 위해 믿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마지막 때를 이룩하기 위해선

반드시 믿음으로 살 필요가 있습니다.

시 37:37 완전한 사람을 살피고 정직한자를 볼 지어다

화평한자의 결국은 평안이로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야곱의 마지막 때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누구나 갖는 마지막 때라도 누구든지 이럴 순 없습니다.

야곱은 믿음을 나타냈습니다.

죽음에 대한 용기 있는 모습이기 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있는 믿음이 야곱을 이렇게 세운 것입니다.

야곱은 마지막 때에 이 모습을 남기는 신자가 되기 위해

평생을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① 축복자가 되었습니다.

축복은 큰 자가 작은 자에게 복을 빌어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했다는 것이

일반적 축복과 다릅니다.

「죽을 때에」가 어떤 때입니까? 분주하거나 피곤한 때는 아니더라도

죽음의 그늘이 엄습하는 두려운 때입니다.

생애 최고의 두려운 날, 두려운 때가 이 때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은 유언보다 축복했습니다.

본문은 요셉의 두 아들에게 각각 축복했다고 했지만 자신의 낳은 아들 12명도

각각 축복했습니다.

왜요? 유언의 가치보다 축복의 가치를 더욱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또한 손자된 요셉의 각 아들을 축복함을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자신의 사랑스런 아들이지만 현재는 애굽의 총리입니다.

자식들에 있어서 쉬운 아들이 있고 어려운 아들이 있다면

「요셉」은 어려운 아들일 것입니다.


일찍이 집 떠나 죽은 줄 알았기에 아버지로서 해준 것이 없었고

그럼에도 바로 다음의 권세자가 되었기에 어려운 아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데 그 아들 요셉의 뜻과

상관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차남을 장남보다 높이는 축복을 했습니다.

관행이나 전통이나 아들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따랐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의 용기」라고 할 수 있고 본받아야 할 덕목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축복한 두 손자들은 혼혈아입니다.

그럼에도 축복함으로써 자기의 분명한 혈통에 가입시킨 일은 「노망」이 아닌

믿음의 순종이었습니다.

훗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백성됨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때에 야곱은 눈이 어두웠습니다만 지혜는 완전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고

준행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고후4:16) ~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② 경배하였으며

마지막 때에 지팡이 머리에 의지한 체 예배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예배는 그 사람과 그 신앙을 증명합니다.

예배하지 않고, 오히려 예배를 업수히 여긴다면 신자가 아닙니다.

또한 교회라고 하지만 예수그리스도가 높임을 받지 않는다면 그 역시 교회가 아닙니다.

반면 예배하며 그 예배에 온갖 준비와 마음과 예물을 드린다면 성숙한 신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야곱을 상상해 보십시오. 건강하거나 젊은 야곱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의 야곱입니다. 그럼에도 경배합니다.

지팡이 머리에 의지한 체 마지막 땅에서의 마지막 경배를 합니다.

혹 살고자하는 소원을 갖고 경배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다면 목적 있는 경배인 만큼 참 경배로선 합당치 않습니다.

혹 평소의 습관대로 경배한다고 여겨지십니까?

습관은 습관 될 수록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습관적 예배자를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점점 예배에 권태를 갖어 소홀히 합니다. 습관적 설교자를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능숙한 만큼 능란함을 갖고 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 참 경외감을 갖고 예배하는 이들은 언제나 이렇듯 최선을 다 합니다.

*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고전2:3)


위의 사도바울의 경우도 배짱부족으로 떤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거룩함과 책임감에 심히 떤 것입니다.

현세의 부족함은 「경외감」입니다.

예배자가 쇼핑족처럼 오고 설교자가 쇼 진행자처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마지막 때에」 관심이라고는 오직 죽어가는 자기 자신에게 맞추게 됩니다.

「장례는 어떻게 치르라」 「장례 후는 어떻게 하라」등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이 역시 믿음의 위대함입니다.

신자가 이토록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면

하나님 역시도 그 사람을 그토록 높이시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그의 마지막 기도를 보면

창48:15) 나의 남으로부터 나를 기르신 하나님, 하여

자기의 모든 날에 필요하신 바를 공급하신 이는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여

하나님 존귀를 확실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창48: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하므로

자신이 겪었던 모든 어려움과 시련과 불행을 추억하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은혜에 「감사」하고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럴 수 있습니까?

죽음의 그늘이 다가오며 호흡이 어려워 올 때 마음의 눈은 주를 향하고,

식어가는 입술의 말은 하나님의 증거와 감사로 일관시킬 수 있습니까?

확실한 것은 현재는 아니더라도 훗날 우리의 마지막 때에는

우리도 이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의 소유자는 아니 그의 믿음이

안정보다는 곤란에서 그리고 곤란보다는 죽음에서 빛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비상용 전등은 평상시에 모릅니다. 그러나 전기가 그치고 폭풍우가 몰아칠 때

스스로 발광하듯이,

내 안에 믿음이 그렇습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2)야곱

우리는 야곱을 별난 인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이 믿음이 있었던 것 아닙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형을 속인 간특함의 인물이었습니다.

이 일 땜에 삼촌 집으로 피신했지만 그곳에서도 간특함으로 재산을 불려

삼촌의 시기를 받았던 인물입니다.

고향을 향해 오지만 형의 분노를 의식해서 형에게 아부하는 치졸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져 버리는 자기중심의 욕심쟁이, 불량자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이렇듯 믿음으로 마지막 때에 축복하고 경배할 수 있음은

야곱에게 있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 때를 확신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야곱에게 이런 하나님이듯이 내가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가

아버지 이삭, 그리고 자신까지 또한 그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3)우리의 믿음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맺은 만큼

* 확실합니다.

*영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믿음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는 날 만큼

믿는 날 수 만큼 헛된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원숙한 믿음을 만들어 주십니다.


결론) 여러분의 희망사항은 무엇입니까? 마지막 때에 그려보는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마지막 야곱의 모습을 그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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