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 성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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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방황을 하는 어느 집사님이 대형교회를 찾았다가 그만 황당함을 보았습니다.
“주일 예배 중에 목사님은 설교단에서 인터폰을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운동동작을 하고
얼굴에 로션을 바르는 등,,기도시간에는 교역자들이 교인 수를 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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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 그 목사님을 성토했습니다.
“설교기술자인지는 몰라도 예배자는 아니다”고 했습니다.
1)예배
구원받은 성도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성결한 일이 예배입니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이 예배를 위해 날을 지키고자 하던 일을 멈추었고
이 예배를 준비하기 위해 부인들은 저고리 동정을 다시 달았고
고무신을 빨아 장독대에 널어 말렸고 성미를 매식마다 구별하여 모았고
헌금은, 동전은 지전으로 구겨진 지전은 다리미로 다리거나 새 돈으로 바꾸어 바쳤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요.
피곤한 피난살이에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높여 기렸습니다.
이러한 예배는 성도로써 특권이고 의무이기에 구원의 감격과 감사가 들어납니다.
또한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 앞에 한 작은 창조물로써 경외감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배를 위한 설레임과 하나님앞에 선다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도에게 예배는 고달픔의 노동이 아니라 해방과 환희요
‘성찬금지’는 큰 수치의 벌로 여기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과 자숙과
회개의 기회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예배가 현대는 어떻습니까?
정숙이 없습니다.
집중도 없습니다.
한갓 공연처럼 되어 하나님을 향하는 신령한 일이기 보단
모여 있는 회중들을 만족하게 하는 일로써 굳어지고 있습니다.
개신교가 줄고 있습니다.
어느 기관이 조사해보니 천주교로 많이 갔는데
그 이유 중 “예배가 정숙하지 못해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성도가 모인 곳은 가능성이 있고 빠진 곳은 피폐함이 더할 것입니다.
늦고, 휴대전화 받고, 물 마시러 가고..
도무지 예배자로서의 하나님과 주변사람에게 예절이 없습니다.
극장을 가면 영화상영 전에 안내가 나옵니다.
제일 먼저 비상구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는 “앞좌석을 차지말라.”는 주의를 줍니다.
휴대전화는 어떻던가요?
쓰레기는 어때야 합니까?
대체로 우리의 공연문화는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만
성도의 예배의식은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앞선 교회의 직원이 예배 후의 쓰레기가 많이 나오는 곳을 살폈더니
유아실이 아니었습니다.
찬양대 석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사용한 주보 악보 등이 버려진 체 있었습니다.
흔히 여행은 떠나기 전의 15일 전부터 설레임이 있고
다녀와선 3일까지의 여운이 남는답니다.
예배도 이런 설레임과 여운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은 예배순서나 예배장소나 시간이 개혁되어서가 아니라 예배자가 바뀌면 됩니다.
“날마다 다투는 부부가 있습니다.
이 부부의 다툼을 그치기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합니까?
은은한 색 벽지로 바꾼다고 칩시다. 어떨까요? 그때 뿐 아닐까요?
가구를 바꾼다고 칩시다. 역시나입니다.
이 다툼의 부부에겐 집을 바꾸고 나라를 바꿔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방법이 있습니다.
자신들이 먼저 바뀌면 부부관계가 달라지고 좋아집니다.“
부부간에 상대를 높이면 결국 자기 자신이 높아집니다.
남을 낮춰서 자신이 높아지리라는 이기심은 마귀적입니다.
부인을 “중전마마”로 여기면 자신은 “상감‘이 됩니다.
아니면 “영감”도 됩니다.
하나님을 높이는 예배입니다.
우리는 지목받은 예배자입니다.
예배에 있어서는 프로입니다.
벧 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2) 제사장의 옷
오늘 본문은 성막에 이어 각종제사를 집례하는 제사장의 옷 만듦이 등장했습니다.
겉옷과 속 옷 그리고 머리에 쓰는 관까지,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에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대충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구약의 성도들은 참 힘들었겠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묵상하면 하나님의 소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재료와 모양이 계시 된 성막,
이런 지파의 계시된 제사장,
이런 옷을 입은 제사장의 제사,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차별화되지 않은 제사가 아니라 완전 차별화된 제사를 원하시는 의중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는 예배하는 성도입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자원함은 절대적 필요지만 자율적인 요소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이며 성시교독이며 찬송이며 기도며 헌물이며
사람의 마음대로 넣거나 뺄 수 없습니다.
이런 게시에 의해서 전승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구약의 제사법에 의해 “예수십자가의 흘린 피안에서”
예수님이 성막되시고
예수님이 제물되시고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시고
예수님이 여러 까다로운 제사가 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
이제는 내가 그 역할을 이루워 내는 일입니다.
벧 전 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 니라
제사장의 옷을 보면 제사 드리기에 합당한 ‘기능적인 면’도 있지만
매우 존귀하고 영화로운 직위임를 부각시킵니다.
출28:2) 네 형 아론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지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할 찌니
왜 그럴까요?
왜 의사들은 흰 가운을 입을 까요?
왜 판검사는 검은 가운을 입을까요?
일과 이미지에 맞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짓도록하신 제사장의 옷은 영화롭고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을 제사하는 일이 영화롭고 아름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쓰임 받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지만 이 직무를 행할 때만큼은
영화롭고 아름답습니다.
이제 이 제사장 옷은 없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의가 제사장 옷이 되어 나를 지키고
나를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하나님께 당당히 나아감을 얻느니라
이런 의미에서 예배자는 대충의 옷도 삼가야 합니다.
시대와 문화와 지역이 달라도 예배자는 최상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옷이 다름 것은 마음가짐이 다른 것이요.
결국 행동거지도 다르게 됩니다.
여성의 경우‘청바지와 스커트의 차이’입니다.
남성의 경우 ‘신사복과 예비군복’의 차이입니다.
“예배당이전 예배를 참석했습니다.
한 복음가수가 특송을 했습니다.
의상이 가슴이 파이고 반짝이가 들어있는 무대의상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 가수의 의상이 화두로 삼았습니다.
일반가수 출신이랍니다.“
예배는 어느 누구가 아닌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3) 여호와께 성결
제사장의 관을 보면 희안한 것을 달게 했습니다.
요즘 모자를 보면 각종 약자나 상표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모자를 쓰는데 왜 메이커 로그를 붙이고 다녀야 할까?
마뜩잖습니다.
제사장은 ‘여호와께 성결’의 글을 정금판에 도장을 새김같이 새겨 끈으로 달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는 제일 큰 소원입니다.
‘예배자는 성결하라’는 주문입니다.
부정한 동물은 제물로 거부하셨습니다.
백성들에겐 먹지도 보지도 만지지도 행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결도 그렇습니다.
깨끗함입니다.
특별히 “성결하라.”는 단회성이 아닌 지속성입니다.
예배를 위한 한 번의 손 씻음 같은 성결보다는 그 앞선 삶속의 순결을 명령하심입니다.
얼마나 잊고 있는지요?
요령 ,성과, 시대주의, 보편주의, 등에 묻혀서 성도의 성결은 물론 교회의 성결도 없습니다.
인권신장주의들의 주장으로 가해자인권은 보호되면서 피해자의 인권은 유린되고 있습니다.
학생들의 인권을 앞세우니 교사들의 인권은 무시되고 있습니다.
인권은 보호할 가치지만 자칫하면 모순을 갖고 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자가 가치 있습니다.
주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모든 가치조차 가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이 소중하지만 그 돈을 불태워서라도 해야 할 가치의 일도 있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을 대신 할 예배자가 없습니다.
가치도 없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할 일이 교회와 성도에겐 없습니다.
감옥에서도 병원에서도 공항에서도 으뜸되는 일이 됩니다.
히11: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이슬람교도들은 어디서나 메카를 향해 하루 5번씩 엎드립니다.
여기에 비하면 성도의 예배는 부족합니다.
이런 차이가 결국 이슬람교는 점점 왕성해지고 기독교는 쇠퇴해 지는 양국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나의 가치만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몸이 산 제물 되는 일입니다.
예배당의 예배보다 평소의 삶이 예배입니다.
“여호와께 성결”입니다.“
헌금도 소중합니다.
많이 드리는 일도 소중합니다.
그 보다 더 소중함은 성도 자신입니다.
일상의 삶입니다.
힘들더라도 ‘의’를 추구하고 ‘인자’를 베풀어야 됩니다.
의식주에 성결을 힘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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