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생활을 지나면서
페이지 정보
본문
차마고도는 히말라야를 넘는 길입니다.
중국에서 생산된 차를 티벳상인들인 인도에 까지 내다 팔기위해 다닌 길입니다.
협곡을 지나고 구름 위를 지나는 길입니다.
처음부터 이 길이 난 것은 아닙니다.
상인들이 다니다보니 험산준령에도 길이 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처음부터 길은 없습니다만
자주 다니니 길이 됩니다.
희망도 그렇습니다.
희망을 갖는 사람에게 희망은 있습니다만
희망을 져 버린 사람에겐 희망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외가 있습니다.
1)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은 조상 적부터 찾아주신 하나님이었습니다.
애굽에서의 노예살이가 고달팠을 때에 그들에게 하나님은 찾아주셨습니다.
모세를 통해 큰 표적으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시고 마침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복지로 인도하셨습니다.
이러한 출애굽을 보면 몇 가지 의구심이 듭니다.
왜 애굽을 가나안화 시키시지 않고 가나안으로 향하게 하셨는가?
왜 광야를 거쳐야했는가?
왜 광야는 그토록 고생길이었는가?
여러분의 해답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해답은 성경전체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론에 있습니다.
그 첫째 답은, 애굽은 애굽이며 가나안은 가나안이라는 엄숙한 구별입니다.
애굽은 세상의 상징이고 가나안은 천국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 애굽을 가나안화 시키지 못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죄악으로 망할 대상이며 천국은 이상적 나라이기에 ‘임하며’
찾아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답은, 광야는 우리구원 받은 성도가 꼭 거쳐야 되는 과정입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을 받습니다.
민간인이 훈련소에서 군인으로 거듭 태어나는 이치와 같습니다.
400년의 애굽살이는 이스라엘을 뼛속까지 애굽화 시켰습니다.
의식주는 물론 정신과 신앙까지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중국 연변 주는 조선족자치주입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보존되어 있다지만 어느 덧 중국 화 되어 있습니다.
조선족이 우리 동포라지만 중국 사람으로 이해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해방이후 60년의 세월이 우리 고유함을 잃게 만든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애굽을 빼야합니다.
이 애굽을 죽여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본성으로 재차 태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백성의 조상은 야곱입니다.
그가 라반 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습니다.
그가 고향으로 되돌아 올 때 그가 상수리나무 밑에 묻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요?
창35:2) 야곱이 이에 자기 집과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 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한마디로 옛것입니다.
광야살이가 필요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맞추어졌던 성도의 의식주에 관한 가치가 빼내져야 합니다.
옛사람의 성품이 주의십자가에 날마다 죽고 장사되어야 합니다.
골3:2~3)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구원받은 성도가 여전히 세상에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듣고 기도하며 경건에 착념하는 일이 옛사람 옛 성품 옛 습관을
상수리나무아래 묻는 성결작업입니다.
그런데 성도 안에 놀랍게도 오히려 살려는,
애굽으로 되돌아가려는 성향이 크게 활동합니다.
자신의 기도내용을 상세히 보십시오.
신앙의 목표를 점검해보십시오,
우리가 구하는 복이 무엇인가요?
성공은 어디에 있나요?
세상에서의 부귀,성공,형통이 아니던가요?
바로 이런 현상 때문에 3일이면 끝날 광야 살이가
40년으로 늘어난 것을 잊어서는 않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를 향한 염려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출13:17)~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즉 성도가 ‘세상과 세상의 것을 사랑할까’ 하심입니다.
구원받은 백성에겐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요 영적 간음이요 우상숭배요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시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셋째 답은, 왜 광야 길이 고생살이였는가? 입니다.
3일 길이 40년이 되니 고생이지요.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순종과 성결치 못한 옛 성품 탓입니다.
우리 신앙의 가장 큰 적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자신입니다.
불리한 환경, 신앙박해는 오히려 유익합니다.
하나님께 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사랑과 내재된 옛 성품이 입술로는 “주여 주여” 시인하면서도
주를 내치고 세상과 세상 것을 붙들려는, 그 속에서 발견되려는
성공주의 출세주의입니다.
경건의 모양 속에 감추어진 교만이고 탐심입니다.
남은 “죽으라‘하면서도 진작에 자신은 죽지 못하는 이기심이
큰 장애입니다.
이 성공이 신앙성공이며 이 소원이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는 경건의 모습입니다.
롬7:21~24)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사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이 고백과 이 탄식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구원받은 자요, 또한 날마다 두렵고 떨림으로 자기구원을 이루는 모습입니다.
2) 광야 길의 의미
광야의 고단한 여정, 그 길의 피곤함의 의미를 아셨습니까?
옛사람, 옛 성품을 온전히 제거하여 성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가나안에 입성시키기 위함입니다.
본문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또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하셨습니다.
신8:11~114)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버린 자식, 잃어버린 자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능력 부족의 하나님. 출장 중인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내가 런닝셔츠를 빱니다.
김칫국물은 묻은 것은 세제로 비비고 누런 것은 삶습니다.
놀랍게도 희고 부드러운 런닝셔츠가 환생됩니다.
런닝셔츠도 세제속에 삶기우니, 새것처럼 됩니다.
런닝셔츠의 고난과 고통,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물며 죄에 오염된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으시고 고난의 통에서 삶습니다.
그래야 영의 사람으로, 거룩한 사람으로, 천국사람으로 마침내 성화되고 영화됩니다.
신8:7~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바로가 강팍할 것을 아셨기에 모세를 더 강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연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할 것도 아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하셨습니다.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 네가 알게 하려 함이라“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이토록 강력하게 끄시고 강경하게 말씀하심은
그들이 “목이 곧은 백성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신9:6)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그럼에도 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천성으로 인도해 들이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3) 성도의 희망
성도에게는 희망을 붙잡아서 희망이 있고 걸어가야만 길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고난 중에 있는 성도에게 확실한 희망이 있는데 곧 ‘약속과 보장’입니다.
신8: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신8:4) 이 사십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 하였느니라
여기에 명심할 것은 “지켜 행하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입니다.(신8:11)
옛 믿음의 사도들은 이 광야의 의미를 잘았습니다.
불같은 시험 속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다가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하며
희망을 붙잡았습니다.
아니 믿었습니다.
예수님도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히:9)
고난이 없는 신앙은 복음의 신앙이 아닙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이때 “마귀는 너희 죄 때문이라며” 속살거립니다.
그럴 듯하지만 아닙니다.
내 죄는, 우리 조상들의 죄도 이미 십자가 위에서 대속되었습니다.
현재의 고난은 ‘하나님의 사랑표현’입니다.
사랑은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