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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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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8-14 17:40 조회 1,330회 댓글 0건

본문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바라는 바는 동일합니다.

공부하는 자식인 경우 공부를 잘 한다면 좋지만

그 보담 그 자식이 건강하길 바라고 형제간에 우애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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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께도 소원이 있습니다.

거창한 소원이 아닙니다.

정치적인 것도, 민족적인 것도, 종교적인 것도 아닙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것입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또 다른 성경에는“제물을 드리러 가던 중 형제와 다툼이 생각나거든

먼저 형제와 화해한 후 제물을 드려라“

 

그리고 “의”를 행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소원은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긍휼없는 예배자,

화목치 않은 예배자,

부당한 거래를 이루는 예배자가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러 오면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드리고 가면서 명심해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큰 예배당의 예배와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것이

예배로 생각했다면 착각입니다.

서로간의 긍휼,

서로간의 화해,

개인적으로 의를 행함이 우선입니다.

이 소원은 ‘참사람다움’의 회복입니다.

복음적 신앙의 주안점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한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앉아 먹는다 하여

바리새인들이 공격했습니다.

왜 공격했나요?

예수님에 대한 무지와 오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의인들을 찾아오신 것으로 알았습니다.

또한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만 열심있는,

인간적이지 못한 신앙의 소유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연 긍휼을 베풀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며

예수님조차 판단했던 것입니다.

이 신앙은 복음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우리도 어느덧 바리새인화 되어

우리식으로만 믿어 독선이 되고

정치적인 일에 개입하여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기독교안티가 왜 생겼습니까?

기독교가 주님의 소원대로의 ‘참사람다움’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권사시어머니가 불신의 며느리를 쥐 잡듯이 잡습니다.

심하게 책망할 일이 아니라 본을 보이고 긍휼히 여길 일입니다.

 

자신들은 예배 중이라며 차를 빼주지 않자,

동네주민의 차가 2시간 동안 갇혀 있어 화가 난 그 주민이

‘개념없는 교회’란 제목의 글을 인테넷에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종교적이긴 하지만 상식도 없고 인간미도 없습니다.

 

특별히 예배는 성도의 특권이고 의무입니다.

그렇다면 예배자는 자신을 흠 없는 제물로 드리길 힘써서

일상속에서의 자비, 화평, 그리고 사회 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기도가 막히지 않고

찬송이 헛되지 않는 비결입니다.

 

2) 우리들의 착각

주님은, 내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시면서

“너희가 알았더라면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착각하고 있음을 깨우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열심 있을수록, 믿음이 좋을수록

주일의 예배당 안에서만 전체인 냥 살고 있습니다.

바람직한 모습 같지만 주님 보시기에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종교에는 ‘윤리’가 있습니다.

윤리는 신앙열매입니다.

나무에 열매가 없다면 잎만 무성해 지듯이

신앙에 윤리가 없으면 종교형식만 무성해 집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외식신앙’입니다.

주님의 책망이 여기에 임했던 것입니다.

종교가 세상에 감동을 주지 못하는 이유가 ‘윤리상실’입니다.

 

비록 다락방이나

비록 소수가 예배할지라도 윤리가 있을 때 예배는 ‘산예배’가 되며

그 예배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지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

 

우리나라의 정치는 하급이라고들 합니다.

대선을 앞두고 있지만 저들의 활동과 발언이 주목을 받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윤리가 신뢰인데 신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왜 비정치인인 안 교수에게 마음들이 갑니까?

신뢰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의 주소와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인이 감소하는 이유는 ‘소득증가’라기 보단 ‘윤리실종’입니다.

답은 무엇인가요? ‘윤리회복’입니다.

 

그런 면에서 주님이 “너희가 알았더라면..”하심은 예배와 윤리를 별도로

구별시킴이 아니라 ‘예배의 완성’입니다.

윤리가 있는 예배자의 예배,

곧 신령과 진정의 예배입니다.

 

3) 사람도 인정

인도의 수상을 지낸 간디는 영국 유학시절이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교회당을 찾았지만 영국 신사들의 신앙은 간디를 거부했습니다.

피부색이 자신들과 다른 이유였습니다.

실망한 간디는 교회당 밖의 계단에서 상심한 마음을 달래는데

마음속에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 그 교회당에 왜들어 가려고 하니?

나도 그 곳에서 나왔단다.“

그 후 간디는 교회당을 다니지 않게 되었습니다.

대신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예수는 좋은데 예수믿는 이들은 그릇되다.”

 

주님이 찾아오신 것은 사람을 찾아오셨습니다.

특별히 “나 같은 죄인을 찾아서‘입니다.

주님의 생애를 보면 사회적 약자를 많이 찾으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삭개오

거지 나사로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 어느 덧 교회가 이러한 이들에게 문턱이 높은 곳이 되었습니다.

“누구나 오라”는 주님의 말씀은 인용합니다만 차별합니다.

비슷한 동류의 집합장이 되고 잘난 사람들의 사교 클럽이 되어 갑니다.

 

저도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새 예배당에 입당하니 종전의 노인 예배에 오신 이들을 삼가랍니다.

이유인 즉, “젊은이가 오지 않는다.” 였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몸이라면서 사람이 주인이라는 반증입니다.

 

이 모습은 주의 몸된 교회를 세우기보단 허무는 일이요

주님을 예배한다지만 오히려 배척하는 일입니다.

 

결론) 우리가 꿈꾸며 세우는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주님의 의도하신 교회는 어떤가요?

일치됨이 있습니까?

 

주님은 예루살렘의 웅장한 성전을 보시면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다시 세우리라“하셨습니다.

건물을 지향하는 신앙, 껍데기입니다.

종교형식만 강조하는 교회, 유대교회입니다.

 

주의 몸된 교회는 주의 뜻이 세워져야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 못 박혀 대속하신 그 죄인이 살아나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에 의한 교회는 헐려야 합니다.

주님에 의한 교회는 세움을 받습니다.

마12:30)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복음의 신앙, 어려운가요? 자비, 화평, 의의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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