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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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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6-22 21:07 조회 1,379회 댓글 0건

본문

사도행전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의 원판입니다.

 

이 사도행전에는 두 가지의 기록이 분명한데

첫째는 사도들의 발걸음과

둘째는 그 사도들의 발걸음을 주장한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습니다.

 

1) 초기 성도들

초기 성도들은 현대 성도들과 다릅니다.

1. 우선 숫자가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를 시작해서 형성되다 보니

지금처럼 가는 곳 마다 교회가 있고 성도가 있질 못 했습니다.

 

여러 능력 사건과 기적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어도

주류인 유대교나 당시의 헬라 철학 신봉자들에 비하면

미미했습니다.

 

2. 또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생활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경건한 귀부인들이 비록 교회에 속했고

헤롯의 젖동생과 시저의 충성된 일꾼들이

들어오긴 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 때문에 전면에 나서서 신앙생활하지를 않았습니다.

 

주류의 성도들은 하층민, 억눌린 계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출신인 것과 같습니다.

자연 핍박을 많이 받았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터키의 카타콤은

초기 성도들이 신앙따라 핍박을 피해와서

살았던 동굴 신앙 공동처입니다.

바위에 여러 동굴을 뚫어 놓고 살았습니다.

 

3. 그러나 이들의 믿음은 훌륭한 믿음이었습니다.

모든 교회의 기초석이 될만합니다.

회개하여 구원에 이룬 합당한 열매를 가졌습니다.

곧 성령충만이었습니다.

 

고넬료의 경우,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이

찾으실 만큼 많은 구제와 항상 기도하며

식민지 국가의 군인이었어도

피식민지인 이스라엘의 칭찬을 들었습니다.

 

성도들 마다, 각종 신령한 경험과 은사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중풍병자 아나니아를, 또 죽었던 다비다를 살리었고

사도바울은 떨어져 죽은 청년 유두고를 살려 냈습니다.

 

그러나 경험만 중시하거나 믿지 않고

두라노서원에서 말씀을 강론할 때 배웠습니다.

 

균형잡힌, 머리와 가슴이 뜨거운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이었으며

증인들이었습니다.

 

마침내 이들로 말미암아 터키가 전 로마와 유럽이

복음화 될 수 있었습니다.

 

2) 성령의 활동

성령님은 사도행전시대에 참 많이 활동하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성령의 강복을

기다리던 성도들에게 찾아오심부터 시작하여

말씀듣는 성도들에게 오시고

사도들이 안수할 때 임하기도 하셨습니다.

 

초라하고 나약한 성도들이 큰 확신속에서

담대하고 거룩하도록 확실히 동행해 주셨습니다.

 

3) 현대교회

목사로써 사도행전을 보면 너무 부럽습니다.

반면 현대교회를 보면 답답합니다.

초기의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았더라”

했건만 현대는 그렇지 못 합니다.

왜 같은 주님의 못된 교회요, 성도인데

이런 격세지감을 느낄까요?

‘성령의 유무차이’입니다.

이 차이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시대 탓일까요?

성령님 탓일까요?

성도 탓일까요?

 

성도 탓입니다. 믿음 탓입니다.

현대의 성도는 초대교회의 성도들만큼

성령님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부자이고 스스로 강자라고 믿기에

성령님이 필요없게 된 신앙이고 오시길 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보십시오.

성령님의 감동이 계실만큼 기도하기 보다는

회의해서 다수결의해 버립니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이루도록 해달랍니다.

않되는 일은 기다리기 보다는 돈으로 다 해치웁니다.

 

성령님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보다

앞서 분석하고 예측하는 지식과 방법이 있습니다.

 

자연 성령님은 그리고 그 분의 활동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기도보다 다른 활동이 증가되고

말씀을 배우는 일보다 돈을, 방법을 찾는 일이 그 증거입니다.

 

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돈)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 뿐 일세

 

나의 사모하는 선한 목자는

어느 꽃다운 동산에(적당한 방법에)

양의 무리와 늘 함께 가셔서

기쁨을 함께 하실까

 

이것이 현대교회의 크나 큰 범죄요. 배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님이 왜 성령님을 보내셨을까요?

요16:12~14)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

그러하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가운데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현대 학교에 교권이 무너졌습니다.

문제가 학생입니까? 선생님입니까? 정책입니까?

근본이유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교육말고 사교육이 있기 때문입니다.

더 근본 이유는 아이들이 공부에 절대적 절실함이 없습니다.

무엇인가?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권이 확실히 산 학교와 학생들이 있습니다.

 

지리산의 한 학교는 외국에서도 유학을 옵니다.

공부가 절실한 학생들이 모여 있기에

컨테이너 교실도, 격주로 가는 집에 가는 합숙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배우려는 학구열 때문에 선생님도 보람을 갖고

전근와서 함께 숙식하며 가르킵니다.

 

여기는 문제 학생이 없었습니다.

폭력이 없습니다.

밝고 환한 얼굴의 선생님과 학생들 뿐이었습니다.

 

도시학교의 퐁경과는 너무 다르지 않습니까?

지리산 골의 고등학교이기 때문입니다.

학원이 없습니다.

학생들에게 다른 믿는 대안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예로

강북의 교회에서 시무하니 학생들이 교회도 잘 오고

잘 돌았습니다. 그러면서 명문학교를 갔습니다.

과외, 학원을 몰랐습니다.

 

강남의 교회에서 시무하니, 학생들이 교회를 못 옵니다.

학원, 과외 때문이랍니다.

그런데 대학교를 잘 못 갔습니다.

 

여의도에 시무하니, 두 모습을 합쳐놓은 모습이었습니다.

이것도 잘 하고 저것도 잘 하는 모습이 아니라

이것도 저것도 못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지금은 30~40대의 장년으로써 이 때의

익숙해진 모습으로 각자의 삶을 살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가난하고 무식했습니다.

헤쳐나갈 일이 많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향한 믿음의 기도는 성령이 오시고

머물도록 하였습니다.

성령님의 오신 목적대로 그들의 보혜사가

되셨습니다.

 

현대교회는 강남의 아이들 같습니다.

무기력합니다. 그런데 있을 것 다 있습니다.

공부의 필요를 못 느낍니다.

 

요즘 웬만한 교회는

골프 선교회, 축구 선교회, 트럼펫 선교회가 있습니다.

 

선교는 밖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목적입니다.

이 모습이 선교의 목적인가요?

초대교회 때도 각종 스포츠와 사우나가

기승을 부린 때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 없었습니다.

지금은 스포츠쎈터가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말세교회에 경고했습니다.

라오디케아교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계3:15~18)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통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니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하도다.

 

찔리는 것이 있습니까?

 

결론) 아직은 기회가 있습니다.

그 방법도 계시해 놓으셨습니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케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발라보게 하라.“

 

교회의 권위는 ‘영성’입니다.

주체는 예수님이고 보냄을 받은 이는 성령님입니다.

 

사람을 붙들지 말고 돈을 따르지 말고

방법을 구사하지 말고 바른 믿음위에 재건축하면

세상속의 교회로써 든든해질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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