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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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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3-29 22:27 조회 1,295회 댓글 0건

본문

중국은 큰 땅과 오랜 역사만큼 요리도 다양합니다

“하늘에는 비행기, 땅에는 기차, 네발 달린 것에는 의자만 빼고는 다 요리가 된다”

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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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 “하늘에는 용, 땅에서는 나귀가 최고이다”하여

나귀요리도 있습니다

 

우리에겐 어리석은 나귀로 알려진 이 동물이

중국에서는 최고의 요리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1) 성경의 나귀

성경에는 많은 나귀가 등장합니다

*발람선지자를 책망한 나귀

*사울의 잃어버린 나귀

*꿇어앉은 나귀등

이러한 나귀는

옛 이스라엘 생활 속에 밀접했습니다

그 생활 속에서 최고의 나귀가 있다면 어떤 나귀일까요?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을 향해 힘겹게 입성한 나귀입니다

 

나귀의 영광은 나귀자체에 없습니다

무슨 장식이냐가 아니라 누가 탔느냐가

영광의 관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왕의 왕 되신 예수님을 태운 나귀를,

 

‘옛날 나귀에게 돌부처를 실은 마부가 있었습니다

한참 가다보니 선비가 절을 하고

또 한참 가다보니 노인네가 합장하고

또 한참 가니 애를 업은 여인이 절을 합니다

 

이 때 나귀는 생각하기를 사람들이 자기에게 절을 하니

자기는 무거운 짐을 싣고 다닐 나귀가 아닌 줄로 알았습니다

이 나귀는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꼼짝을 않했습니다

“이랴 이랴” 마부가 고삐를 재고 채찍으로 때려도

나귀는 꼼짝을 않했습니다

 

그러자 마부는 곧 알았습니다

이 나귀가 착각하고 있음을,

마부는 몽둥이로 나귀를 때렸습니다

“이놈 나귀야 정신차려, 사람들이 너를 보고 절한 것이 아니라

네 등위에 있는 신상 때문이야“

어리석은 나귀입니다.‘

이 예화는 곧잘 어리석은 사람을 비유합니다.

 

나귀의 영광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길가의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하며 환호한 것은

나귀를 맞이함이 아니라 주님을 맞이함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태운 나귀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러한 나귀가 현재 이집트에서는 물가상승으로 인해

자동차의 대용품이 되어 수레를 끌고 있답니다.

말보다 작아도 힘이 쎄고 다루기가 비교적 쉽기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의 나귀

주님은 왜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을까요?

정복의 왕이 아니라 섬김의 왕이셨기에

백마보다 나귀가 합당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영향력이 크십니다.

청와대 갈 때와 지방 갈 때의 자동차가 다릅니다.

검은 승용차는 의전용이고 저비용 디젤 자동차는

일상용입니다

그 목사님이 무슨 차를 탔느냐 따라

행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볼품없는 나귀도 모자라

힘조차 없는 새끼를 타셨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휘청거리는 나귀 새끼를,

의젓하지 못하고 발 끌리면서 불안불안

앉으신 예수님을, 나귀 새끼를 탔다는 표현 보다는

묻어간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왜 주님은 이래야만 했습니까?

옛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성취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왜 이 모습을 원하셨을까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과시나 호사가 아닌

죽음을 향한 입성이기에

당당함보다 순결함이 요구된 탓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를 찾아야 되었고

그 나귀가 새끼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나귀새끼의 상징은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와서 배워라”하신

주님의 겸손함과도 일치가 됩니다.

 

말구유 위에 누우신 예수님과

나귀새끼를 타시고 입성하신 예수님은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 가난으로 우리를 부요케 하시고

그 낮아짐으로 우리를 높아지게 하시고

그 겸손함으로 우리를 담대하게 하셨습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3) 대속함을 받은 나귀

출13:13) 나귀의 첫 새끼는 다 어린 양으로 대속할 것이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려면 그 목을 꺾을 것이요.

 

이상한 대목이고 이상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나귀의 첫 새끼를 사람처럼 어린 양 희생으로

살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이라는 명령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겐 하나님 백성으로써

살 계명과 율례가 주어졌는데

그 중 한 율례입니다

다른 동물에겐 이런 은혜, 이런 주문이 없습니다.

왜 유독 나귀에게만 있을까요?

특별히 수컷에게만,

여러 신학적 의미가 있겠지만

‘구원’의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새끼는 묶여 있었습니다.

그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는 영광의 나귀,

예루살렘을 입성하는 나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묶여있는데서 풀려야 합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 묶여있었습니다.

출애굽은 자유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노예살이에는 한숨, 눈물만 있었지만

출애굽시에는 찬양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풀어 가나안을 향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 출애굽 사건은 우리의 모양을 웅변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태어나면서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사망에 매인 것입니다.

평생의 종노릇해야 할 운명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처럼 나귀를

대속하신 것처럼

묶여있는 나귀를 풀어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것처럼

우리를 풀어 자유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길보다는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위에 성취하도록

하심이 으뜸입니다.

 

기독 신앙은 내가 얻고자 함을 얻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선물을 받는 신앙입니다.

 

그중 죄에서, 사망에서 대속 받는 것

이처럼 묶인데서 풀어 자유케 되는 것이

최고이며 시급한 일입니다.

 

결론) 많은 동물 중에 대속함을 받았던 것,

풀어 자유케 된 것, 나귀의 우월함에 있지 않습니다.

무조건적 하나님의 선택이고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새끼나귀를 친히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것은 은혜의 최고입니다.

택하신 우리들의 구원의 모습입니다.

 

만백성 중에 아무리 탁월한 능력자요 지혜자라도

스스로가 대속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가 매인 것을 풀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영광을 취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예루살렘을 입성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보혈과

주님의 자유함과 주님의 주인되심과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귀 새끼 같은 허약한 형편과

못남을 가졌다 해도 우리는 영광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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