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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갈의 방성대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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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2-02-07 19:22 조회 1,495회 댓글 0건

본문

사람이란 사회나 환경의 영향 따라 달라지기도

하지만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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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들어 높은 곳, 나은 곳을 보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눈을 뜨지 않고 아니면

낮은 곳을 볼 때 만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위스나 미국같은 선진국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불평될 수 있으나 북한이나 우간다 같은 빈민국에

태어나지 않음에 감사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1) 하갈

하갈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권이 신장되지 못한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났고

신부가 아닌 종으로써 아브라함 집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애굽사람이기에 특별한 우대 보다는

오히려 그 집안의 종들로 부터도 심한 차별을

받았을 것입니다

 

모진 그녀의 삶을 웅변해 주는 사건이 있는데

본처인 사라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그녀의 설득으로 주인된 아브라함의 아들을

잉태한 후 사라의 시기와 학대로 도망가야 했던 사건입니다

 

흔히 도망가는 경우

1. 환경의 이유가 있습니다

북한 탈북자들은 북한이 피폐하기에 의식주 해결 때문에

탈북합니다

 

2. 관계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하갈의 경우입니다

배고픔은 참는데 남 잘되는 것은 못 찾는 죄의 성품이

사라에게도 있어 학대받은 하갈은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도망나온 하갈에게 하나님은 다시

되돌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참을 수 있는 비젼을 주셨습니다

 

창16:9~10)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자손으로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이 다시 주인집을 찾은 것은 환경이나

관계가 나아져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아들에 대한 비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대였습니다

 

창16: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2) 하갈의 방성대곡

학대 받은 모진 삶,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비젼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대치가 있었기에 참고 참았을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 낳은 아들이 15세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하갈의 삶은, 여전히 종의 삶이요

현대가 말하는 다문화 가정의 어미의 삶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는 또 다른 사건이 터졌습니다

15세된 자신의 아들이 본처가 난 아들을 희롱하는 사건입니다

 

아버지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는 다 자신의 아들

일지라도 어미가 다른 여인들의 입장에선

특별히 본처인 사라가 보았을 때는 큰 사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은 사라와 이스마엘을 내 쫒기로 합니다

감정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이기

때문입니다

 

창21:12)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신지라

 

본문은 아들과 버리움을 당한 하갈의 방성대곡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방성대곡은 목 놓아 크게 우는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 흔하지 않은 모습니다

 

하갈에게는 죽게 된 아들의 모습으로 시작되었지만

그동안의 종살이 설움, 미래의 불안함과 두려움 등이

점철된 통곡일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살면서 겪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면

방성대곡 같은 경우입니다

 

누구든 이런 방성대곡을 계획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이 방성대곡이 있습니다

 

3) 우리의 믿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악하고 나 비록 약해도, 각종 위기가

범람했을지라도 ‘방성대곡’하는 지경까지는

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첫째 이유는 시대나 환경같은 좋은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항상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1:32~33) 어리석은 자의 퇴보는 자기를 죽이며

미련한 자의 안일은 자기를 멸망시키려니와

오직 나를 붙드는 자는 안연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평안하니라

 

내게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그저 은혜일뿐입니다

 

우리의 착각중 하나는 종종 우리는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는데

기도라는 믿음의 공력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고 더 앞서고 있음을 간과하면 않됩니다

19절)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시니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웠더라

 

방성대곡하는 하갈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탈무드의 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자신의 소망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를 바꾸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고함으로써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의 권능을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정화되며

높아지기 때문임을 잊어서는 않된다‘

 

기도의 중요한 것은 유창함이 아닙니다

자칫하면 유창함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힘은 진정성입니다

 

방성대곡만한 진정성이 있을까요?

이런 힘의 기도가 있을까요? 그럼에도 풍성한 은혜를

앞서지 못합니다

 

우리에게는 환난이 빗겨가는 은혜의 자리에 있습니다

혹 환난이 왔다 할지라도

피할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새요 망대이며

피할 수 있는 힘은 믿음의 기도

진정성 있는 기도입니다

 

결론) 갈라디아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한

사건을 놓고 육신의 성품이 영의 성품을 군박하는

예로 말씀했습니다

성도된 우리 안에 두 성품이 있습니다

자연적인 육신의 성품입니다

탐욕적이고 이기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성품입니다

이 성품은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기업을

물려받지 못하듯이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받지 못합니다

 

성도에게, 새 성품이 심겨졌는데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하늘을 지향하며 온유와 겸손합니다

 

두 마음은 결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 성품은 십자가에 못 밖아야 합니다

“성령을 쫒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 안에 새 성품이 심겨졌습니다

생명의 법입니다 성령이 주관하시는 성품이기에

온유와 겸손을 이루기에 ‘방성대곡’하는

상황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방성대곡’하는 상황이 일어났다면

육체의 성품인 ‘사망의 법’이 나를 주장했고

내가 그 지경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상황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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