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육체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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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그리스도의 육체고난
본 문 벧전:4:1~2
일 자:2011년 4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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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주님의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무엇에다 비교할 수 있나요?
가시와 엉겅퀴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비아 돌로로사’입니다.(via dolorosa,주님이 가신 십자가 길,슬픔,고난의 길)
주님 탄생시 시므온이 이를 웅변합니다.
눅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1)그리스도의 삶
그렇습니다.예수님은 처음부터 ‘비난의 표적’으로 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의 고백대로,
요1:9~11)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이쯤 되니, 주님 삶의 실수나 실패는 없어도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참 빛이기에, 세상은 싫어하고 거부했습니다.
자연 탄생도 힘들었고 아기 때에도 애굽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공생애는 어떻습니까? 환영보다 “유령이다”“미쳤다”함을 듣고
나중에는 제자에게 팔리고 동족들에게 배반함을 당하였습니다.
결코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결코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며 예수님을 싫어했던 죄악과
그 결국인 사망을 이겨야겠기에, 체념이 아닌 자원함으로써 이 모든 고난과
고통의 쓴잔을 마시었던 겁니다.
사53:5~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
2)세상의 고난
세상에 왜 고난이 있습니까?
왜 고통이 있으며 사망은 왜 있습니까?
살인,거짓,사기등과 같은 불의가 있기 전에 하나님에 대한 불 경건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불경건의 뿌리는‘하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인생이
하나님처럼 되리라‘ 했던 교만입니다.
이 죄의 뿌리가 “하나님을 알되 감사치도 않고 영화롭게도 하지 않는”
타락을 만들었고, 그 결과 저주가 오고 고난과 고통과 죽음이 오고
땅은,가시와 엉겅퀴를 낸 겁니다.
타락하여 저주받은 인생과 땅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습니까?
오직 탄식뿐입니다.
이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모든 타락과
저주에서 속량하셨습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우리의 허물 값, 그리스도의 고난과 고통은 필연적이고
우리의 죄 값, 주님의 죽으심은 절대적인 겁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기 때문입니다.
3) 주님의 완성
이제 주님의 이러한 대속으로 허물 값, 죄의 값은 역사상 해결되어
사망은 권세를 잃었고 타락과 저주는 좇겨 갔습니다.
본문이 이를 가리킵니다.
벧후4:1~2)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이 은혜와 이 공로로 죄의 결박에서 벗어나고
고난과 고통과 죽음에서 해방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이룩하셨습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그 어떤 구원이나 구원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4) 성도의 적용
이제는 이 ‘그리스도의 육체고난’에 관한 성도의 적용만 남았습니다.
성경은 ‘교리’가 앞서 나옵니다.
그 후 적용할 ‘윤리’ 즉 ‘기독교 윤리’가 나옵니다.
오늘의 멧세지도 이것입니다.
이미 이루워진 그리스도의 육체고난이 내게 어떻게 적용됩니까?
성경의 사건을 예로 들겠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미 모세부터 아니 아브라함때 부터
이미 이스라엘백성에게 허락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가나안 7족속과 싸워야 했습니다.
싸움 중, 이상하게 조그마한 ‘아이 성’에선 참패를 당했습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물은 즉, 백성의 범죄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범죄를 들어내기 위해서 제비뽑기를 했는데 ‘아간’이 지목되었습니다.
이 범죄와 범죄자를 멸한 후에야 비로써 그 성을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가나안의 정복, 약속이 있었음에도 ‘많은 수고와 세월’이 소비되었습니다.
아간을 멸하신 것을 보아,구원받은 백성으로써 ‘성결’은 절대적이었습니다.
무슨 얘기인가요?
무슨 교훈인가요?
이미 천국이 우리에게 주어졌을지라도, 그 나라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와 많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백성의 성결은 절대적 필요입니다.
천국은 믿음으로 가는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그리스도의 육체고난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여 삶에서 죄를 그쳐야 됩니다.
믿음 따로, 삶 따로가 아닌 믿음이 삶을 이룩해야 합니다.
현대교회의 부족이 여기에 있습니다.
과잉 열심이 세계최고의 교회는 만들었지만, 신뢰를 잃어
신임 받지 못한 체 있습니다. 고쳐야 합니다.
특별히 본문의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는
로마서의 ‘여길 지어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단순히 ‘생각하라’ ‘간주하라’가 아닌 ‘예수처럼 하라’입니다.
롬5:10~11)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에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생각하며 여기는 실제적 행위와 행동이 없다면
우리의 탁월한 믿음은 ‘신념’보다 못하고, 우리 신앙은 수고 없이
얻고자하는 ‘탐심충족교’가 됩니다.
생각하고 여길 때,우리는 시행착오을 겪습니다.
*생각하라,여기라 했건만 그렇치 못합니다.
옛 습관에 길들여진 탓입니다.
* 세상 유혹을 뿌리치지 못합니다.
죄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념이나 의식이 아닌 실제 삶에서 죄를
거부하는 모양인데 쉽질 않습니다. 죄된 세상이 성공,성취등으로
화려하게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촉구합니다.
*몸을 불의의 병기가 아닌 의의 병기로 드려라.
*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음이라(롬6:13~14)
여기에 애씀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성공이 있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주께로 더 가까이 가는 모습입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하는 고백이 됩니다.
이런 경건에도 탄력이 붙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나는 날마다 죽노라”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죄에서 죽고 의에서 사는 하나님 나라’는
‘이상의 나라’이긴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적은 ‘이상적인 나라’는
아닙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우리 안에 이미 이루워 졌고, 기필코 하나님이 이루십니다.
나로부터 가정과 사회로 이루워져 나갑니다.
결론) 한 주간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고난에 대한 감상보다, 내 죄를 그치는 일에 주안점을 둡시다.
매년 맞이하는 이 고난 주간에 내 고질적인 죄악중 하나를 뽑아낸다면 어떨까요?
세상 떠날 때는 장성한 분량의 그리스도의 모습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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