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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법(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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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1-04-11 15:37 조회 1,348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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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휴전선에는 남과북의 국경임만큼 긴장이 팽배합니다.

그러나 유럽이나 중국남부의 경우 자유왕래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민족의 차이가 아니라 법차이입니다.

우리는 북한이 ‘주적’인 반면,저들은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1)하나님의 법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법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에 의한 법인만큼 ‘거룩하고 의로운 법’임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에겐 ‘무겁고 무서운 법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완전한 요구가 있기에 무겁고

그 법을 이루지 못할 만큼, 그 법에 의해 정죄받기에

사망법이 되어 무서운 법이 된 겁니다.

 

이 법은 하나님의 판단기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더니, ”

죄에 대한 기준입니다.

 

이 법아래 온전한 인생은 없습니다.

지옥판결을 받은 겁니다.

 

이 법 탓에, 이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도 무섭고 심판하시는

공의로운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법의 참 취지는

인생들이 죄인됨을 깨닫게 하시기 위함이요

구원의 필요를 절감한 인생들이 구원의 주가 되신 ‘예수’께

인도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사망을 내린 법일지라도, 이법의 인도따라 예수를 만나 구원을 받게 되면

이 법으로 말미암아 ‘사랑의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은혜의 하나님’을 뵙게 됩니다.

예수를 만나기 전에는 정녕‘사망의 법’이었으나

그 법의 참된 기능을 따르니 이젠 ‘생명의 법’이 된 겁니다.

 

이 율법의 완성자는 ‘오직 예수’외에는 없습니다.

사람되신 예수께서 이 법의 모든 요구를 온전히 이루셨기에

법의 의로움을 나타내셨고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도 의로운 분으로 증명했고

예수님도 의롭다고 인정받았으며

더 나아가 예수를 믿어, 예수와 연합된 인생도 의롭다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법성취로 말미암아 법도 살고

하나님도 온전히 계시되고 예수님도, 그 예수님을 믿는 인생도

다 ‘의’을 누리게 된 겁니다.

 

2)성도와 법

이법은 모세로부터 예수님까지만

그리고 이스라엘백성에게만 주어진 한시적 법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것은

하나님 법으로써의 ‘대표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더 이상 위협적이질 않습니다.

이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법은 성취되었고

생명 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방인(과거)처럼,법없는 사람도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처럼,법있는 사람도 아니며

예수님처럼,법에 관한 한 자유한 사람입니다.

 

마치 군대에 대한 의무가 제대한 사람에겐 효력이 없듯이,

성도에게는 이 법에 관한한 자유가 주어 졌습니다.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다 이런 뜻입니다.

 

그럼에도,이 해방된 자유를 만끽하지 못하고 율법의 의무를

감당하고자 하는 신앙인이 있습니다.율법주의입니다.

반면 해방된 줄 알지만 그 법에 길들여져 있어

자유와 무관한 신앙인도 있습니다.

제대한 후에라도, 과거의 무서운 특무상사에게 길들여 있던 옛습관 때문에

군인만 보면 경례하는 모습입니다.

 

이들에게는 ‘여전히 죄에 매여 있고, 평안이 없으며 자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공로보다 자신을 믿는 모습인 만큼

하나님의 은혜에는 감사 감격이 없게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도 그랬습니다.

친구가 벼락에 맞고 죽는 것을 본 후 벼락도 무서워 졌습니다.

애써 고행과 금식을 이루워도 더욱 매일뿐“나 구원 받았다.”는

자유와 감사가 없었습니다.

아니 종교개혁이전의 모든 기독신앙의 모습은 그랬습니다.

애씀은 있어도 성취가 없었기에, 당시‘찬송가’는 무거웠던 겁니다.

 

그러나 성경을 바르게 연구했던 참 기독신앙인으로부터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은 종교개혁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 후,기독신앙에는 자유,희열이 넘치게 되고

찬송가는 경쾌하며 예배는 축제가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주의 성령이 함께 계셔서

믿음이 더 하고,평안이 더하는 증거가 있어 각종 시대의 핍박과

삶의 역경도 이기게 되었습니다.

 

이 모습을 ‘복음적신앙’이라고 합니다.

과거 ‘율법적신앙’을 능가하여 자원하는‘순교’도 이루곤 합니다.

 

사마리아의 수가 성 여인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여러모로 눌린 삶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우물가의 예수님을 만난 후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에

들어가 외쳤습니다.

그 힘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명령입니까?기쁨의 자원입니까?

 

뽕나무위에서 주님을 만난 삭개오는 어떻습니까?

“만일 내가 뉘것을 토색하였거든 4배나 갚겠나이다.”

법으로 갚는 것은 2배였습니다만 그 법이상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해방된 은혜, 구원의 감사, 그 의롭다함의 감격에서 온

자발적 힘이요, 성령의 힘인 겁니다.

 

찬송가 가사를 보십시오.

“~ 늘 불러도 아쉰 맘 뿐이네”

“내게 있는 것을 아낌없이 드리네”

 

이들에게서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거나 폐하는 모습이 있습니까?

오히려 그 법을 더 굳게 세웁니다.

진정한 예배자,진정한 전도자,진정한 헌신자는 율법에서 없습니다.

 

현대교회에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옛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처럼,율법적신앙이 있습니다.

이들은 법만 내세우기에 정죄가 은사입니다.

이런 교회가면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 바로 이들이었습니다.

법이 사는 것 같지만,실제 법도 죽고 사람도 죽습니다.

없어야 할 교회요 신앙인데,유감되게 참 많습니다.

특히 전통이요,보수라는 곳일수록 살펴보아야 합니다.

 

반대로 복음적신앙에는 법에서 자유했기에 ‘성령’으로 삽니다.

사랑이 있습니다.치유와 회복이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이루워야 할 교회입니다.

 

원래 법은 나를 보는 거울입니다.

그러나 ‘죄’가 계명을 속이고 나를 속여 남을 보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법은 사랑을 지시하고,사랑은 법을 지지하건만

죄가 교묘히 속여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의속임에 넘어가지 않고 이 법도 지키고

사랑도 이루워 내셨습니다.

이젠 예수님이,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서로 사랑하라”

그렇습니다.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요.모든 선지자들의 강령입니다.

 

3)세워지는 법

하나님의 법은,하나님 나라의 기둥입니다.

어느 나라든 무슨 나라든 법은, 지켜짐으로 가치가 있고

튼튼해 집니다.

 

법률적으로,강압적으로 지켜지는 법은 부실합니다.

사랑으로 지켜질 때 더욱 튼튼합니다.

 

과거 예수님 밖에 있을 때에는 법도 없고 하나님도 없던 자였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안에서 하나님도 있고 법도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사랑도 있습니다.

나도 살고 법도 삽니다.

 

예수님은, 법만 알고 사랑없는 종교지도자들을 준엄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마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십일조는 율법입니다.

사랑은 ‘의,인,신’은 사랑 아닙니까?

결론) 종교적일수록 법만 앞세웁니다.갈등과 다툼이 큽니다.

그러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초월 합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않습니다. 설녕 이루지 못해도 죄는 않됩니다.

생명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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