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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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성소 안에서
본 문:눅1:17~23
일 자:2011년2월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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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한말,남자들의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이 내려 졌을 때
큰 반발이 일어났습니다.
심지어 대한문 앞에서 자결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부모가 물려 준 신체의 훼손은 죄악으로 간주하는 유교적
사상을 받들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마다 중요시 여기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명예,건강,재물,관계 등 여기에는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그저 ‘다름’만 있을 뿐입니다.
1)성도의 중요 가치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의 중요한 그 무엇은 무엇인가요?
여기에는 ‘다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만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며 꾸짖었던
제자들에게 그 가치를 교훈하셨습니다.
눅18: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앞선 구절을 보면,어린아이들이 ‘만져주심을 바라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받듦’의 정확한 표현은, ‘만져주심을 바라’는 모양입니다.
물론,받듦의 대상은 ‘하나님나라’이며
그 중심은 ‘하나님’입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과의 관련된 모든 것들을 세상 어떤 것 보다
중요시 여겨 사모하라는 의미입니다.
흔히 말세를 운운하는데
말세는 과학이 퇴보된 시대가 아닙니다.
이 가치와 받듦이 실종된 시대입니다.
유감되게, 세속적인 것을 더 받드는 시대인 것입니다.
자연 구원의 문은 닫히는 시대가 되고
구원 받는 사람이 적은 시대가 됩니다.
그럼에도 이 세상 속에서 이외적인 부류가 있다면
곧,성도인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태국에서도 김치를 먹어야 밥 먹은 것 같고
고추장을 먹어야 힘나는 민족은 누구입니까?
아직까지는 대한국인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대한국인도 ‘만국입맛’이 되어 갑니다.
커피 없이는 못 살아도 김치 없이는 잘 사는 사람들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이 모양은.우리의 전통문화를 상실한 모습이요
우리 것을 받들지 않고 소홀히 여긴 탓입니다.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받들지 않으면 누가 받들겠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시들하다가 자멸합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죽은지식이 됩니다.
특별히 ‘예배’는 받듦의 최고의 모습인 만큼, 소홀히 하는
반대적 모습도 나타냅니다.
2)실종된 ‘이상’
옛 세례요한의 부친 사가랴 제사장은 제사 중에
천사의 방문과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이때 성전 밖의 사람들이 이 제사장의 벙어리 된 모습을 보고
‘그가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로 생각했습니다.
실제 맞았습니다.
당시의 성전 밖의 사람들이 벙어리가 된 제사장을 보고
‘중풍왔구나’하지 않은 것은 그런 일이 일반적인 일이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상’
그리고 교회의 일반적인 ‘생각’
현대는 어떨까요?
여러분의 목사가 이럴 경우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시대의 탓일까요?
신앙의 탓은 아닐까요?
그 이유의 장본인은 하나님일까요? 나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나라를 ‘받듦’ 경우일까요?
소홀히 한 경우일까요?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기적,능력행함,귀신을 쫒아냄,병나음 등이
왜 현대는 없나요?
하나님은 출장가고 마귀는 이사했나요?
하나님나라를 받들지 않은 탓에 실종되다시피 한겁니다.
하나님나라외의 것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많다보니
이 가치에 매력을 잃은 겁니다. 사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무엇이든 하나님나라에서 얻는 것 만한 것이 없습니다.
요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 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솟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신앙에서 하나님의 이상을 바랍니까?
목마르지 않는 생수,풍성한 생수를 사모합니까?
성소안에서 ‘이상’을 바란다면
성소 밖에서의 삶이 경건해야 합니다.
3) 받듦의 모양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지녀야 됩니다.
어느 남성이 기르던 개를 데리고 뒷산에 산책 갔다가 큰 멧돼지와
맞닥뜨렸습니다. 놀란 나머지 자기 개를 불렀습니다.
뒤 따라 오던 개는 망설임 없이 달려 와서 자기 몸보다 서너 배가 큰
멧돼지와 1시간 30분 동안 혈투를 벌려 이겼습니다.
그 남성은 개 덕에 살아 난 겁니다.
그의 고백은 “나는 행복합니다. 함께 해 주는 개가 있기에,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며
닭을 삶아 개에게 먹였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개로 말미암아 목숨을 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개를 받들어선 안됩니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성도는 어떤가요?
멧돼지로부터 죽다 살아 난 이 남성보다 더 확실한 신뢰가
하나님께 있어야 하며 더 큰 행복자여야 합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이 아버지입니다.
구원자입니다. 동반자입니다.
눅12:4~5)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두려워하라 곧 ‘받들라’하심입니다.
*하나님을 받듦은,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와 근심은 일란성 쌍둥이입니다.
그 어미는 ‘불신’이고 아비는 ‘자기믿음’입니다.
자기를 믿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하면 할수록
염려와 근심은 사라집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 착고에 채인 채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천사가 구출하러 와서 그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감옥에서 매 맞고 갇혔지만 찬송할 수 있었습니다.
잠과 찬송은 평안의 띠입니다.
이 희한한 모습을 본 빌립보감옥의 간수는
사도 바울의 복음을 받아 들였습니다.
눅12:22)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왜 그랬습니까? 절대적 안전보장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눅12: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 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성도에게는 영생이,노후가,그리고 오늘이 다 보장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너희일까 보냐”가 누구인가요?
불특정다수인 입니까? 아닙니다.
예수안에서 하나님을 받드는 모든 성도입니다.
이 하나님 받듦의 신앙에 도전해 보십시오
실생활에서 모험해 보십시오
전투경험이 없는 군인은 약골 됩니다.
안정만 추구하고 번영만 구하는 신앙에는 진보가 없습니다.
물은 어느 불꽃, 무슨 그릇이라 할지라도 꼭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98도, 99도로 10년되고 20년되어도 끓질 못합니다.
신앙의 년수가 오래되어도, 좋은 교회를을 다녀도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이상’에 죽은 자 같다면
한주간이라도 하나님과 그 은혜를 먼저 받들고
이 성소에 예배자로 앉아 보십시오.
유대 땅에 보편적으로 임했던 ‘이상’이, 그것이 무엇이든 임할 겁니다.
출애굽기는 구원의 기록서입니다.
모세와 그 백성들이 성막짓는 모습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식양따라 지었습니다.
자원함의 사람들이 순종했던 겁니다.
매 과정마다 반복되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대로 하였더라”
마침내 모든 성막이 완공 된 후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습니다.
놀라운 이상, 신기한 현상으로 성령이 충만히 임하셨던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결론) 개인의 경건이 교회의 경건이며 시대의 경건입니다.
여러분은 성소입니다.
우리가 성소입니다.
경건 할 때,오늘의 예배중에,내일의 기도 중에 ‘이상’이 임하고
훗날 이 세상 떠날 때 천사에게 받들려 아브라함 품에 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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