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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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작은 고을
본 문:미5:2
일 자:201년 12월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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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서 먼 혈관일수록 가늘어서 피의공급이 적습니다.
태초에 여인의 후손이 오리라하셨던 구원의 복음은 세월이 흐를수록
사람들에게 경시함을 받았습니다.
그 불신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는데
1) 사마리아인의 출생입니다.
잡혼을 금했던 유대인들이 이방사람들과의 혼인에서 생겨난 혼혈족입니다.
잡혼을 금지시켰던 이유는 민족성 보존보다
신앙의 거룩성을 보존시키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2)예루살렘의 산당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의 수도입니다.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은 이삭을 드렸던 모리아산이 있는 곳이요
그 후 그곳에 역사적 성전이 있던 곳인데
이제는 잡신을 섬기는 산당이 만연해졌습니다.
1.불경건의 모습
이 둘의 모습은 무엇인가요?
불신앙, 불경건의 대표적 모습입니다.
언제나 누구나 불신앙이 생겨 불경건하다면 불의를 따릅니다.
윤리적으론 흩어짐이 생겨 방종과 탈선이 있고
신앙적으론 경건의 모양만 있을 뿐 능력은 없습니다.
현대종교가 그렇고 현대기독교가 그렇습니다.
감리교의 감독회장 선출과정에서 불거진 다툼은 수 년 동안 합의를 못해
세상법정까지 나갔건만 역시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결국 법원이 장로교장로인 변호사를 감독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임하는 굴욕까지 겪었습니다.
천주교는 어떻습니까?
정진석주교의 말에 이의를 단 정의사회구현단이 정진석주교를 향하여
교구장에서 사퇴하라는 하극상까지 범했습니다.
불교는 어떻습니까?
정부의 예산지원이 삭감되었다 해서 정부와 불통을 시도합니다.
호국불교는 옛말이고 염불보다 제사에 관심 갖는 모양이 되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의 말이 생각되지 않습니까?
세기말의현상중, 원칙없는 정치 그리고 희생없는 종교 등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엡4:18~19)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한마디로 불경건하면 방탕하다는 뜻입니다.
반면 경건하면 어떨까요? 단정하지요
오늘 본문인 미가서의 멧세지는,“미련한 자의 등에는 채찍이니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오셔서 사마리아지역을 흩으시고 예루살렘을 고치시겠다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사랑도 있습니다.
흩으시고 고치시겠다는 그 의도가 큰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미7:18) 주와 같은 이가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 속에 내려진 하나님의 채찍, 사랑,
무엇인가요? 곧 예수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2.베들레헴
특별히 본문은 예수님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워진다고 예언했습니다.
역사적으로 성취된 예언이지만
베들레헴을 갖고 어떻게 예루살렘을 고칠까요?
1) 작은 고을입니다.
수도 예루살렘의 주변 고을, 사는 것이 변변치 않은 사람들의 고장입니다.
예루살렘이 사회, 경제, 종교, 문화의 대표적 요충지라면
베들레헴은 목자들이 있는 농촌입니다.
이 작은 곳으로부터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태초에 상고니라 가
오시므로 예루살렘이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우리의 대통령을 보면 명문대학교 출신들이 별반 없습니다.
그래서 “대통령 하고 싶으면 육사가라, 상고가라” 하는 말이 돌기도 했습니다.
작은 자를 들어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무식한 자를 들어
유식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즐겨 사용하시는 방식인데
베들레헴도 그렇게 쓰임 받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이 나셨다”는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 일에 비해
베들레헴은 목자들의 찬양이 있었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신앙이고 경건인지 보여 주지 않습니까?
또한 하나님 보시기에 큰 것은 예루살렘같은 규모나 조직이 아닙니다.
작아도 주님 볼 수 있고 맞이할 수 있는 순수함, 성결임이 증명됩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부패한 정치, 희생없는 종교에는 여러 소동만 있을 뿐, 예수님은 아니 계십니다.
작아도 순결함의 믿음에서만 주님 볼 수 있습니다.
2) 생명의 떡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입니다.
일산은 한 산을 의미하고, 원당을 으뜸의 집을 의미하듯
어떤 이름이든, 나름의 상징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떡집으로 오심을 볼 때, 그 예수님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 할 터이요
나를 믿은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사망의 이유는 타락이요
타락의 이유는 범죄요
범죄의 이유는 사망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사망으로 위협하여 타락하게하고 먹는 것으로 유혹하여 범죄케합니다.
설녕, 먹는 것이 해결되었어도 ‘탐심’을 부추켜 나도 죽고 남도 죽게 만듭니다.
탐심은 사람에게만 있는 죄된 병입니다.
나는 헉헉 거리다 죽게 만들고
남은, 내가 빼앗기에 죽게 됩니다.
한쪽은 배 터져 죽고 다른 한쪽은 배 곪아죽습니다.
사람의 균형감각은 걷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삶에 더욱 필요 합니다
영과 육신, 현재와 미래. 나와 남과의 관계 등
이 조화의 힘은 무엇인가요?
세상 떡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 온 산 떡이신 예수님입니다.
한 번 먹으면 평생 포만감을 누리는 영생의 떡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증하신, 예수 떡은 체하질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풍부에도 처하고 비천에도 처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자족함’입니다. 주님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배운 것입니다.
없어서 기죽고, 있어서 교만하다면 영생 떡의 포만감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이 떡이 되고자 앞서 가루가 되는 듯한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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