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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0-12-16 01:12 조회 1,352회 댓글 0건

본문

제 목:하나님만

본 문:삼상7:3~4

일 자:2010년11월21일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받침하나 중 ‘ㅍ’를 ‘ㅂ’로 쳤더니

검색이 되지 않았습니다.

말 그대로 ‘아’ 와 ‘어’가 확실히 구별 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은 어떤가요?

말 한마디 따라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만’ 섬기라. 할 때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다른 신은 안중에 없어야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할 때에는 심각해집니다.

여러 신 중 하나님이 포함되어 자칫하면 범신론이 되고

힌두교모양이 됩니다.

1)하나님만

하나님만 섬기는 일

예수만 섬기는 집, 자연적으로 다른 신은 배제된 체

유일신 신앙이요, 옳은 기독신앙이 됩니다.

반면, ‘하나님도’한다면 우상숭배요 이방종교가 됩니다.

하나님은 십계명 중 제1계명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하셨습니다.

이 계명은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보편적계명이 아니라

구원받은 하나님백성에게만 주신 특별계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백성은 시대와 민족을 초월하여 이 계명을 준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만 섬길 때와 하나님도 섬길 때와 로

구분됩니다.

하나님만 섬길 때는, 작은 그들일지라도 세계속에서 빼어 난 민족이

되었지만, 하나님도 섬길 때는 포로되는 수치와 고난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만 섬기는 민족, 배타적이다. 독선적이다. 시대감각이 없다. 는

핀잔을 언제나 듣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도 섬긴 민족, 우호적이다. 연합적이다. 시대적이다.하는

세상 지지와 환영을 받을 때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격입니다.

맛 잃은 소금은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어 버리움을 당하는데

하나님이 그러한 민족, 교회, 가정, 개인을 고치시기에 고난이 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결과를 결정합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것인가?

사람들께 인정받을 것인가?

그러나 신앙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하여 아브라함처럼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삶입니다.

십자가의 길은,이러한 때의 내 희생과 곤란을 감수하는 일입니다.

2)예수만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을,‘예수만 믿는’ 신앙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곧 보이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만 믿는 신앙이, 어느 덧 교묘히 들어 온 ‘예수도 신앙’으로

변질 된 것입니다. 실제는 심각한 우상숭배이고 영적간음인데

이를 깨닫지 못한 체 ‘교회라’고 하여, ‘믿음이라’ 하여 그만

‘예수도 신앙’이 되었습니다.

아니 예수님이 오히려 들러리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주일에 교회에서 행하는 일들을, 아직은 예배가 많습니다만

그럼에도 다수의 교회들이 사람들을 위하고 자신들을 위하는 각종행사와

공연을 버젓이 치르고 있습니다.

또 ㅇㅇ축제라는 미명아래 사람들이 만족함을 누리도록 기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영광 받으실 날과 장소와 시간 속에서

자신이든 타인이든의 위로와 공연과 식이 난무해졌습니다.

우리들이 교회 와서 위로받는 일은 당연하고 아름다운 권리입니다.

그러나 그 위로는 성령의 위로, 말씀의 되어야지

사람의 위로, 공연의위로가 되어서는 않됩니다.

주의 종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무해야지 행사, 공연의 기획자가

되어서는 않되고, 성도는 예배자 찬양자여야지 관객이 되면 않됩니다.

3)사람의 기분

왜 이런 변질이 증가합니까?

‘하나님 보다 사람에게’ 촛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예배보다, 순종보다 사람 모으는 일이 능력이고 부흥으로 와전되었습니다.

이 탓에 편의주의가 들어오고

드리는 희생마음보다 받고자하는 보상이 자라났습니다.

신앙이 무엇인가요? 예배가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향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경건입니다.

아브라함에게서 이 모습과 이 예배의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독자 이삭을 3일 길 되는 모리아산에서 번제로 드려라.’하셨을 때

믿음의 순종, 가는 수고, 드리는 희생 등이 최고의 예배였고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서는 다 사라졌습니다.

모양은 예배인 것 같은데 예배가 아닙니다.

종교성과 친교성은 있는데 예수님의 절대성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위로 ,위안’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진정한 위로와 위안은 하늘에서 옵니다.

성령께서 위로의 영이시지만 그냥 위로하시지 않습니다.

죄의 지적, 책망, 자백 후의 위로하십니다.

나단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다윗이 죄를 지적당하고 깨닫고 눈물로 돌아선 그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후 그 죄가 사함 받았을 때의 자유와 평안이 어땠을 까요?

그런 위로를 아십니까? 아니 현대인들이 그런 일을 알기나 할까요?

자신이 좋아하는 몇 가지의 찬송을 부르고 부드러운 설교를 들으면

위로이고 평안인가요?

유감되게 언제부터인가,

설교는 짧아야 되고 웃겨야 되고 책망은 없어야 되고 등

즉 좋은 것만 좋다하고 듣기 좋은 설교가 은혜가 있는 설교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누구는 현대가 사는 일이 힘들고 불안하니 위로와 꿈에 대함이

각광을 받는 다고 합니다. 압니다, 그래서 요즘은 비젼. 능력. 행복이란

단어를 많이 씁니다.

그렇다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어땠을까요?

헤롯에 쫒기 던 성도들,

유대교에 핍박받던 성도들, 생명자체가 위협을 받았습니다.

위로 구합시다. 평안을 기도합시다.

그러나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평안은 거부합시다.

4)대안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내가 무엇을 하면 됩니까?

성경적 대안은 무엇입니까? 내가 변하면 됩니다.

옛 야곱이 베델에 올라갈 때 상수리나무아래 세상저인 것을 묻고

떠났습니다.

창35)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 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자기 사랑, 자기숭배, 죄의 극치입니다.

십자가아래 또 묻어야 합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살지 않겠습니까?

모양이 아닌 능력으로 예배하고

기분이나 밥 힘이 아닌 성령의 힘을 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령을 쫒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결론)얼마 전 방송 중에, 진행자가 물어 왔습니다.

“목사님, 우리 신앙의 기초는 어디에 두어야 합니까?”

제가 곧‘예수그리스도 안“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의 가리킴입니다. 느낌이나 보이는 사실에만 두면 헛 신앙됩니다.

‘예수도’신앙됩니다.

예배를 드렸다.가 아닌, 예배드린 것 같다.는 식이 되어서는 않됩니다.

옛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여러 시행착오 속에

비로써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고 여호와만 섬기는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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