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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사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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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예용범 작성일 11-01-03 18:56 조회 1,46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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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다’라는 인물은 옛 이스라엘의 사사입니다.

사사란,왕조가 형성되기 전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아

그 백성을 다스렸던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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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입다

마치 ‘벗다’의 반댓말 같은 입다에겐

우리와 다른 몇 가지가 있습니다.

*출생이 비천했습니다.

그는 기생의 아들이었습니다.성경에서의 기생은 몸을 파는 창기입니다.

 

신분과 직업의 귀천이 없다고 하는 현재에도 기생의 아들이라면 천시 받습니다.

하물며 보수성이 강한 옛 이스라엘에서는 출세 길이 막혔습니다.

 

마치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것처럼

그는 형제들로부터 쫒겨나 초야에 묻혀 지내야 했습니다.

그 설움,그 고통,그 세월이 어땠을까요?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주변 족인 암논 족이 침공해 왔습니다.

이때 그는 이들을 무찌르고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고 했는데 이 때를 가리킴입니다.

 

*서원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낮은 자가 높은 자가 된 것에 대하여,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삿11:31~)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한것이

무담독녀를 번제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2)그의 생애

그의 생애를 보면 우리와 흡사합니다.

오르락내리락하기 때문입니다.

곤란한 때가 있었는가 하면 형통한 때가 있었고

또 그 형통함은 곧 곤란함의 단초가 되었습니다.

 

이 모습,어찌 입다 뿐입니까?

세상 모습이고,모든 생애의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순조로움을 기대합니다.

오히려 녹록치 않음을 각오해야 되지 않을까요?

또한 곤란할 때 많이 낙심합니다.

형통할 때 너무 기뻐합니다.

다 그릇 된 모습입니다.

곤란 중에도 하나님을 잊지 말고 희망을 가져야 되고

형통할 때도 자숙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 조절기능은 ‘편정심’이라고 하는데 예수안에서만 가능합니다.

주의 말씀이,보헤사성령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다스림에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욥이 그랬지요. 끔직한 고난 앞에서 하나님께 희망을 두었습니다.

욥23:10)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잊지 않습니다. 잃지도 않습니다.

기필코 기억하셨다가 기필코 은사와 목적 따라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곤란 중에는 정금되는 거룩,

쓰시기에 합당한 거룩함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형통은 왜 자숙해야 할까요?

백일 가는 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날마다 형통은 없습니다.

만약 있다면 그 일은 재앙입니다.

왜 그럴까요?“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한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둘 중의 하나입니다.

곤란하던가? 아님,형통하던가?

곤란하다면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하고,형통하다면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두 가지를 병행하십니다.

 

3)입다의 위대함

입다에게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 삶의 모양에서 우리의 삶의 모양을 투영 받듯이

그의 위대함에 고무되어야 합니다.

 

그의 위대함은,용사요 영웅이기에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서원준행’입니다.

사람을,딸을, 제물로 혹은 번제로 드리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 보담

서원했던 그 일을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준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서원과 맹세를 쉽게 생각합니다.

불리하면 어떤 이유를 합리화 시켜서라도 무효화시킵니다.

 

그러나 입다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의 딸 역시 그랬습니다.

부녀가 서원의 가치를 고상하게 여긴 이유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서원준행이 곧 ‘하나님경외’였던 겁니다.

 

우리의 가치는 저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주님안에서 하나님 경외라는 가치는 하나여야 하고

모습도 같아야 합니다.

곧‘복음에 합당한 생활’이어야 합니다.

즉 복음의 중심되시는 예수님의 영광이나 유익을 위해선 협력은 물론

나의 불리함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흔히 ‘하나님 중심’‘예수중심’이라면서 희생감수에는 난색을 표합니다.

희생없는 곳엔,아무런 감동도 발전도 없습니다.

 

누구를 위함이 아닌 자신의 신앙감동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불리할지라도 준행해야 합니다.

 

결론)삶은 곤란함과 형통함이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멀미나고 그래서 고단합니다.

희망과 자숙으로 평정해야 합니다.

서원한 것은 준행합시다.

하나님께 신뢰받는 일은 귀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딸을 번제로 드린 입다의 모습에 백성들은 뭐라고 했을까요?

독한 자,무정한 아비,별난 사사, 분명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그의 성실에 백성은 존경했을 겁니다.

잃은 것은 딸이지만 그 보다 더 귀한 가치를 얻었습니다.

아비의 서원준행을 위해 기꺼이 번제물이 되었던 딸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성들은 그녀를 위해, 매년 며칠씩 ‘애곡’했기 때문입니다.

역사에 기리는 ‘효녀’가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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