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방이 없어요
페이지 정보
본문
올해 미국에서 성경 앱으로 제일 많이 검색된 단어가 “두려움”이었답니다.
사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또 위의 구절을 가장 많이 보았다니 코로나에 대한 두려움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두려워하지 말라
“부러워하면 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검은 짜장면이 붉은 짬뽕을 부러워하면 짜장면은 지는 것입니다.
짜장면은 짜장면이고 짬뽕은 짬뽕이기 때문인데 애당초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러워했으니 진 것입니다.
우리 기독신앙에서 믿음은 담대함인데,, 반대적인 두려움은 불신입니다.
사람이나,, 상황이 두려웠다면 이미 믿음을 떠난 것이기에 실패가 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보장이기도 하면서 믿음의 첩경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잉태 때에 천사들이 일러준 말이 무엇이가요?
동정녀마리아에게,
“눅1:30~31)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
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당시에는 미혼의 처녀가 잉태를 하면 율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잉태를 한다니 두려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이 천사의 방문과 위로로 마리아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눅1:38)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니라
마리아와 정혼했던 요셉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동침한 적이 없는 사랑하는 여성이 잉태를 한다니,,역시 두려운 일입니다.
마1: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
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두려움은 결코 이상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 두려움으로 때론 신중해지고,,
혹은 주께 붙잡힘도 당하여 믿음에서 믿음으로 인도되곤 합니다.
그러나 범사에 두렵다면 병적입니다.
2) 그 때에
이제 세월이 지나 마리아는 출산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황제의 명이 온 세상에 반포되었으니 거슬릴 수 가 없는 일입니다.
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그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일이 우연일까요?
분명히 황제의 통치적인 일이지만 호적하라는 이런 명령은 드문 일이었습니다.
눅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그럼에도 하필 그 시점이 예수탄생인 것은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섭리적 필연임을 보여 줍니다.
황제 보다 하늘의 하나님이 진정한 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때 태어나신 예수님도 호적에 등재가 되었으며 인구조사에 포함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애매한 표현들이 많습니다.
기원이나 출생이 확실치 않을 경우, 아님 대단한 냥 의미를 부여할 경우입니다.
“옛날 옛적에” 아님 “아주 먼 옛날에” 또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이런 표현은 모호하기 그지없습니다.
또 누구는 곰과 호랑이사이에서 태어났고, 누구는 알에서 태어났고 등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아니 애당초 구체적일 수가 없는 이유는 신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하마터면 이렇게 될 소지가 있었습니다.
동정녀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신비한 출생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확실치 않으면 후대의 사람들 특히 역사나 신학 비평가들에게는 좋은 반대구실이 주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호적 때에 탄생하게 하셨기에 이 일을 방지시키신 줄 믿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는 신비였지만 출산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사실과 진실이었던 것입니다.
국가적으로 호적했던 그때와 호적한 일이 증명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출생년도는 지금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호적기록은 사라졌겠지만 아구스도의 황제와 그의 칙령은 역사로 기억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덕에 현대에도 “예수는 역사다”라는 책을 서점에서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예수,, 분명한 실존 인물이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하니 이 또한 우리는 믿습니다.
3) 있을 곳이 없음이라
오늘 성경은 당시의 상황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몰렸고 여관의 방은 부족했었습니다.
눅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사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지금처럼 “놀자먹자즐기자” 하는 세상이 아니었기에 변두리 베들레헴에 여관이 많을 리 없었는데 사람들이 몰리자 방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사람들의 인심입니다.
만삭의 산모는 확연히 표가 납니다.
그럼에도 명색이 하나님을 조상적부터 섬긴다는 족속들인데 이런 산모에게 방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그 옛날의 인심이었습니다.
어떤가요? 현대와,, 미래에도 똑같을 것입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하고 어려서부터 악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교양이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 구원이 필요한 존재임을 증명하며 하나님이
지어주신 “예수”그 존귀하신 이름이,, 그 오심을 증명합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자이심이라 하니라
주님은 의인을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찾아 오셨습니다.
둘째) 요셉의 무능력입니다.
베들레헴은 요셉의 고향인데도 쪽방 하나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 탓에 아기와 산모는 축사에 머물고 강보에 싸인 아기는 말구유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사람이 의로운 것과 능력 없는 것과는 다릅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으나 수완은 없었나 봅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처럼 가장이 이쯤되면 가족이 고생합니다.
그러나 이 요셉능력이 실제 우리의 능력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녀와 부인의 구원은 물론 자기 죄에서 탈출도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이런 상황을 멋지게 만드셨습니다.
지극히 낮은 곳의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고,,
이처럼 가난한 처지에서부터 가장 부한 권세자로 재림하시게 하시는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생들의 삶을 알게 하셔서 우리의 진정한 중보자로 중재하고 계시도록 하셨습니다.
히4:14)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
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이런 일은 상황 따라 갑자기 된 일이 아니라 이미 예언되었고 성경대로 된 일이었기에 섭리하셨고 성취하신 하나님을 찬양
할 수 있습니다.
결론)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감사영광 돌리고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나아가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곧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입니다.
나아가 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증거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