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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설교] 나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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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5-12-01 20:09 조회 1,662회 댓글 0건

본문

2004년 7월 25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말씀 : 빌립보서 4장 15-20절
제 목 : “나의 하나님”
설 교 자 : 예 용 범 목사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쓰는 「우리」라는 말은 「울타리」의 변형어입니다.
그 울타리 안의 사람을 같은 동류로 여겨서 「우리」혹은 「끼리」라는 관계성을 갖습니다.
우리나라, 우리교회, 우리 동네 등
이 범주에서 아주 벗어나면 「저희」「너희」라는 3차원의 표현을 쓰고 이 범주에서 아주 가까운 표현은 내 고향 내 차하여 1차원적인 표현을 씁니다.

1) 하나님에 관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성도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할 때 평소 무의식중에 부르는 하나님 호칭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라고 고백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데는 그 이유가 충분합니다.

◦ 「우리의 목자는 여호와」 혹은
◦ 「나의 목자는 여호와」 할 수 있으련만
◦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하여
그 중심 사상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었고 관계성이 직접적이면서 아주 밀착된 관계인 「나의」였습니다.

사도행전 19장을 보면 아주 재미나는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했습니다.
또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그랬을 때 능력과 권세는 나타나지 아니하고 오히려 악귀가 뛰어올라 억제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가게 만들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 주의 이름이 위대한 능력이요
◦ 놀라운 권세지만,
내가 받아 들여서 내 것으로 삼지 못한다면 내게는 아무런 힘도 능력도 구원도 은혜가 되질 못합니다.

그러니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했던 고백은
단순한 정서적 고백이 아니요
하나님의 관계에서 누린 은혜와 능력의 고백이며 간증인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19-20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우리 모두를 향하신 보편적이신 「우리의」하나님 아버지이시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하나님」으로 믿고 의지할 때
내게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하는 구원의 감격이 경외의 찬송이 됩니다.

아무리 「구슬이 세말」이 있으면 무엇 합니까? 꿰매야 보석이 되지요!
하나님이 살아계시지만, 그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면 난 죽은 자요 이미 정죄 받은 자입니다.
또한 그 하나님이 내 어머니의 하나님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최소한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야 되고
더 나아가 내 하나님이 라고 고백될 때 그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요 화평한 자입니다.

2) 관계성

특별히 본문순서에 유의하십시오.
◦ 나의 하나님이 먼저 나옵니다.
즉 나의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이 될 수 있지만,
우리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못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아버지 어머니도 낯설게 느껴지는 때가 있건만,
하물며 우리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내 아버지로 고백되어진 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나요?
◦ 하나님을 학문적으로만 이해하지 않고
◦ 생활 속에서 증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성경교리에만 계시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체험에만 등장한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성경과 체험에서 증명되고 증험된 하나님이십니까?

또한 하나님과 어떤 관계성에 있습니까?
◦ 내 하나님입니까?
◦ 우리 하나님입니까?
◦ 저희들의 하나님입니까?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 앨버트공과 말 다툼을 했습니다.
앨버트공이 화가 나서 자기 방에 들어가 버리자 여왕은 미안한 마음에 사과하고자 남편의 방문을 두드렸습니다.
「누구요?」퉁명스러운 남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영국의 여왕입니다」그러자 문은 여리지 않았습니다.
여왕은 다시 노크를 했습니다.
「누구요?」「영국 여왕이오!」 역시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여왕은 화가 났지만, 잠시 생각을 가다듬고 다시 노크 했습니다.
「누구요?」「당신의 아내입니다.」
그러자 방문이 열렸습니다.

◦ 그동안 하늘 문이 닫혔다고 생각됩니까?
◦ 그동안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졌습니까?
◦ 그동안 버린 자식 같은 느낌이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살펴보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시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 신앙을 점검해 보십시오.

사 59:1-2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애 3:40-41 “우리 스스로 행위를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3) 나의 하나님

왜 우리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해야 되나요?
① 바른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른 예배란 「모양」이 아니라 언제나 「질」에 있습니다.
그 질은 예배 대상이 누구인지를 바로 알 때 예배자의 태도를 결정짓습니다.

초대교회의 경우,
예배의 모습은 초라했습니다.
성도들은 가난하거나 군박받는 하류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많았습니다.
교회당도 번듯한 건물이 아닌 가정이나 동굴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의 질은 높았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가마니에 천막을 치고도 감격과 환희의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의 임재는 자주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현대는 화려한 예배당, 시원하고 따뜻한 시설,
각 가지 모양은 갖추었지만, 예배는 시들해지고 있습니다.

이유를 아십니까?
예배자들이 나를 구원한 나의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고,
◦ 구약의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 장모님의 하나님
◦ 목사님의 하나님께 예배하기에 관심이 결여되고,
감격과 감사와 진실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박 집사님이 계십니다.
잘나가는 은행임원이며 지성인입니다.
성품적으로 선하고 논리적인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믿기 전에도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과 그 뒤편에는 절대자가 계심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예수님을 모르니 예배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주일이면 성일이 아닌 휴일이기에 여가와 취미생활에 힘썼고
퇴근 후에는 자기 발전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던 중,
성경공부를 통해서 거듭나고 성령 받았습니다.
그 후
절대자가 하나님이시며,
예수님이 여호와시고,
예수님이 자신을 찾아 대속하신 구세주 되심을 믿고 고백되었습니다.

제일먼저 예배자가 되었고,
헌신자가 되었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인식변화와 관계 변화가 이 사람과 삶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내 것이라면
내 머리핀, 내 강아지 하며 끔찍이 사랑하면서도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하는 것,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관계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은 우주적이고 영원하며 보편적인 하나님일지라도 나의 하나님으로 받아드린 사람들입니다.

시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이런 자에게 좋으신 아버지가 되셔서 각종 은택을 주십니다.

② 하나님에 대한 최상의 사랑표현입니다.
사랑은 포괄적인 만큼 아는 것은 물론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도 포함됩니다.

◦ 내 친구야 ~ 하며 소개하고픈 이가 있고,
◦ 내가 아는 사람 중에 ~ 하고픈 이가 있습니다.
자랑스럽다면 「내 친구야」당당할 것입니다.
반대로 수치스럽다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하여 다소 비굴해 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만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큼은 언제 어디서나 내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먼저 사랑하셨으며, 자랑스러워 하셨기 때문입니다.

출 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이니라”

아 4: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세상의 성공자는 「우리」라는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끼리」가 많은 사람입니다.
학연, 지연이 여기서 형성됩니다.

그러나 가장 강한 자가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세상이 대항치 못하는 위대한 강자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는 성도입니다.

나의 하나님! 내 아버지!
강한자의 외침입니다.
이 관계가 더욱 깊고 은밀한 관계로 발전하면,
아버지의 호칭은 「아바」로 바뀝니다.
곧 「아빠」라는 표현인데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더 나아가 「나의 아빠」관계로 발전 시켜야 됩니다.

이 모습이
주가 내안에 거하시고 내안에 주의 말씀이 거하는 능력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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