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설교] 신의 성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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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 22일 주일 낮 예배 설교
본문말씀 : 베드로후서 1장 1-11절
제 목 : “신의 성품”
설 교 자 : 예 용 범 목사
현대과학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 우주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우주 과학은 화성에 무인 탐사선을 보냈고,
◦ 작은 단말기 하나에 온갖 실용기능을 구사하도록 하는 IT산업은 우리나라가 최고입니다.
◦ 되도록 작고 가볍게 만드는 나노사업은 200g 섬유로 달까지 갈 수 있는 길고 긴 실을 뽑아내고 있으며,
◦ 인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유전공학은 인간수명을 늘려 놓았습니다.
1) 신기한 능력
그러나 이러한 모든 첨예과학일지라도 한 가지 밝혀 내지 못할 것이 있는데 곧 하나님과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성도에게 주사 그 성도들로 하여금 신의 성품에 참예하도록 했는데 이를 증명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의 비밀인 만큼 자식이 아닌 지혜의 문제요 과학 실험이 아닌 계시의 믿음 문제이며 하나님 생명에 관한 극 신비에 속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있었답니다.
그 거위의 주인인 할아버지 할머니는 부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흘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죽을 때가 거반 다가오자 한 몫에 황금 알을 갖고 싶어 거위 배를 갈라보지만, 황금 알은 없고 거위만 죽였답니다.
2) 생명
거위가 황금 알을 낳을 수 있는 것은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을 보거나 억지로 소유하거나 했으니 실패한 것입니다.
성도가 신의 성품에 참예했다는 것은 앞서 신의 생명이 심겨졌다는 의미이지만,
이 생명을 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품이 인격과 생활화 될 때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 생명을 주신 신은 누구이고,
◦ 그 생명을 어떻게 성도에게 주었을까? 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과학이 아닌 성경이 계시하고 있습니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보십시오.
아버지의 생명이 아들 예수께로 왔습니다.
이제는 그 아들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게한 증거가 있습니다.
요 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 6:3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왜 기독교가 생명 종교입니까?
왜 예수님이 생명이십니까?
타 종교 보다 타월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생명을 계시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을 주입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이를 증명하는 성경도 「생명 말씀」이요 「생명책」인 것입니다.
요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
3) 경건
사람은 누구든지 이 생명의 주입을 받아야 됩니다.
구원 받았다. 중생했다는 것은 이 생명을 받아 경건해 지는 것이며,
변화했다. 성화되었다 하는 것은 이 생명의 성품이 계속 계속 인품과 생활 속에서 자라나는 모양이고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생명과 이 성품을 받은 한 끊임없는 경건의 변화를 이룩할 수 있어야 됩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 속은 날로 새롭도다”
◦ 어거스틴이 방탕과 방랑에서 회심할 수 있었고, 유럽을 변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고,
◦ 우리의 주기철, 최권능, 한경직 목사님 등 한 세대에 큰 감동을 줄 수 있는 영향도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은 생명을 갖았기에
하나님을 본 받을 수 있고,
예수님을 본 받을 수 있고,
앞선 믿음의 선진들을 본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나무의 뿌리는 물을 따라 뻗지만,
가지와 잎은 빛을 따라 뻗듯이
생명 수혜자를 본 받고자 하는 생명 특성이 우리에게도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본 받고
예수님을 본 받는 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4) 문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분명, 성품은 하나님과 같고 예수님과 같은데 기능면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치 애굽에서 출애굽 하였지만, 여전히 애굽으로 되돌아가자 했던 이스라엘 백성처럼 불완전하기 그지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내 안에 심겨진 신의 성품이 「발아」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반 발아에는 온도, 습도, 영양이 필수 조건입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염려, 육체의 일. 세상 근심이 발아를 방해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발아를 위해서 때론 하나님은 강제적인 방법을 구사하시는데,
① 곧 「성도의 고난」입니다.
금수가 재주를 넘고 말을 알아듣고 하는 등등은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숱한 길들임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빨간 사과나 소담스런 대추의 영근 것도 그냥 된 것이 아닙니다.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땡볕 한달 통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야 오죽하고 성도인들 오죽 하겠습니까?
시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러나 고난도 누가 다루느냐에 따라서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바로에게 받았던 고난과 광야에서 하나님께 받았던 고난이 다릅니다.
전자는 애굽의 노예 되기 위한 고난이었다면
후자는 거룩한 하나님 백성으로써 가나안을 향하는 과정의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고난은 거룩함에 참예하기 위한 고난이요
의의 평강의 열매를 맺기 위한 고난임을 믿어야 됩니다.
②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영광!
예수님의 덕을 더욱 알고자 믿음을 주셔서 깨우치십니다.
여기에 다른 이해나 해석이 필요치 않습니다.
비와 햇빛을 내리시듯이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마다 각기 그러나 합당하게 다루고 계시는 것입니다.
벧후 1: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5 신의 성품
한 발표를 보니 부부 금슬이 좋을수록 서로가 너무 닮는 답니다.
취미, 성품, 용모, 그리고 음성까지도
하물며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한 생명을 받았기에 같은 성품이 나옵니다.
벧후 1:5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러한 신의 성품을 간단명료하게 구별 하면
① 거룩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이상한 복장이나 이상한 걸음걸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함을 분명히 인식하는 자세입니다.
② 의로움입니다.
잠 21:3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착하고 선한 행실이 있어야 됩니다.
그것이 사랑일수도 있고 구제일 수도 있고 봉사일 수도 있습니다만,
결코 의로움에는 어느 한 성품만 강조되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의 아버지라는 얀후스에는 성경에 입각한 신앙 양심으로 「성실」이었습니다.
◦ 성실을 배웠다.
◦ 성실히 살았다.
◦ 성실히 사랑했다.
◦ 성실을 지켰다.
후대에 그를 기리는 사람들이 그의 동상에 적어준 그의 생활상 이었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어떤 의로움이 있습니까?
종종 성도들이 착각하는 것 중,
우리 신앙은 죽어 천국 가는 것만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 가는 삶이기에 지금 이 땅위의 삶도 주님 같은 삶을 살도록 애써야 됩니다.
벧후 1:4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되게 하려 하셨으니...”
사도바울은 신의 성품을 알았습니다.
마치 깨지기 쉬운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것에 비유했습니다.
감사한 것은
이 보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삽니다.
이 보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죽이지 못합니다.
이 보배 때문에 세상은 우리를 주목하여 보며 칭찬하고 때론 손가락질 합니다.
이 보배를 드러내십시오.
지금이 좋은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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